배우 최민식이 얘기한 ‘극장값’이 화제다. 그는 지난달 한 방송에서 “지금 극장값도 많이 올랐다. 좀 내려야 한다. 갑자기 그렇게 확 올리면 나라도 안 간다”라고 말해 극장값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를 두고 한 경영학과 교수가 “무지한 소리”라고 직격하면서 논란을 가중시켰다. 영화산업과 가격 문제는 우리 관심이 아니니 논외로 하고, 다시 제기된 ‘극장값’ 논란은 오래된 ‘버스값’ 논쟁을 재소환한다.
‘값’은 본래 사고팔 때 주고받는 돈
“어린이 등 교통약자를 위해 시내버스값 무료화 추진” “택시값 비싸도 이용자 많다, 프리미엄 택시”처럼 ‘버스값’ ‘택시값’ 같은 말을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예전엔 이런 말이 모두 잘못 쓰는 표현이었다. ‘값’은 본래 물건을 사고팔 때 치르는 대가를 뜻하기 때문이다.이에 비해 물건이나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가로 내는 돈은 ‘요금’ 또는 ‘비용’이다. 그러니 버스값, 택시값은 버스나 택시를 사고팔 때 치르는 돈을 뜻하고,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은 버스요금 또는 버스비, 택시요금 또는 택시비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었다. 이를 좀 더 근사한 말로는 고유어로 ‘삯’이라고 한다. ‘삯’은 일을 한 데 대한 품값으로 주는 돈 또는 어떤 물건이나 시설을 이용하고 주는 돈이다.
1957년에 완간된 <조선말큰사전>(한글학회)에서도 그랬다. ‘값’은 △사람이나 물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가치), △매매하기 위해 작정한 금액, △매매 목적으로 주고받는 돈을 의미했다. 즉 무엇을 사고팔 때의 가격 또는 가치로 풀었다. 지금은 ‘값’의 용법이 10여 가지는 된다. 의미가 더해지면서 말의 쓰임새가 확대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초판본만 해도 <조선말큰사전>의 풀이가 그대로 이어져왔다. 몇 가지 현대적 의미와 용법이 추가되었지만 딱히 논란이 될 거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후 <표준국어대사전> 웹사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보인다. 일곱 번째 항에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가격’, ‘대금’, ‘비용’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란 풀이가 추가된 것이다.
지금은 서비스 이용료·비용 뜻도 있어
즉 ‘값’의 전통적 의미와 용법 외에 ‘대금이나 비용’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 풀이가 더해진 것이다. 다른 항목들이 본래 의미를 현대적 쓰임새에 맞게 세분화한 것에 비해 이 항목은 전에 없던 새로운 의미와 용법을 추가했기 때문에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초판본(종이 사전)이 1999년에 나왔고 2008년부터 웹사전을 선보였으니 그 이후 넣었을 것이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기름값, 물값, 물건값, 부식값, 신문값, 우윳값, 음식값 같은 말이 이렇게 해서 ‘값’과 어울리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그중 대표적 단어가 ‘전셋값’이다. 전세금 또는 전셋돈은 전세를 얻을 때 해당 부동산의 소유주에게 맡기는 돈을 말한다. 원래 이런 말로 쓰이던 게 1990년대 들어 ‘전셋값’이 급속히 떠오르면서 앞의 말을 대체했다. 특히 1999년도에는 전셋값이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는데 “서울·수도권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 30% 육박” 같은 표현이 연일 지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전세는 기한이 만료되면 보증금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니 원래 ‘값’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전세금 또는 전셋돈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셋값’은 현실 언어에서 이들을 압도하는 ‘대세어’로 자리 잡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뒤 웹사전을 내면서 표제어 ‘값’의 풀이에 대금이나 비용의 뜻을 나타낸다고 추가한 것은 이런 실태를 수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극장값’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데 드는 돈으로 풀고, ‘버스값’을 버스를 타는 데 드는 값으로 설명해도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식 단어로 오르지 못했어도 개방 사전인 <우리말샘>에는 이미 올라 있다. 하지만 정통 규범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극장값’이 여전히 거슬린다. 어떻게 자리 잡을지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