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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저신용 부채 시장에서 밀실 협상과 배신 등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 급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고금리 장기화로 투자 부적격 등급의 채권·대출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늘면서다. 공공금융기관 주도의로 체계적인 채권단 자율협약이 가능한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민간 금융기관들의 결속력이 약해 금융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고금리 장기화로 재정난에 내몰린 미국 기업들이 저신용 부채 시장에서 '채권 관리 행사(Liability Management Exercises·LME)' 전략을 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사모펀드 운용사가 소유한 부실 기업들이 주로 LME 전략을 사용해 채권자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 소유주인 사모펀드 운용사는 채권자들 가운데 특정 대출기관에만 우선 접근한다. 해당 기관을 설득해 만기가 도래하는 부채를 금액이 더 작은 규모의 장기채로 교환하도록 유도한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기업은 이 같은 협상을 통해 당장의 상환 부담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나중에 갚아야 할 부채의 규모를 줄인 상태로 더 긴 기간에 걸쳐 상환할 수 있게 된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라도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이러한 교환을 받아들인다. 사모펀드 운용사가 비밀리에 우선 접근한 채권자들과 협상을 타결하면, 나머지 채권자들은 협상에서 배제되고 더 불리한 조건을 강제로 수락해야 할 수도 있다. 채무조정안은 채권단 과반수 합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통상 총 채권액의 50% 이상을 보유한 대형 채권자들에만 이 같은 '특혜'가 제시된다.
기업들은 '채무 관리'라고 주장하지만, 채권 투자자들은 이를 '채권자 대 채권자 폭력'이라고 부른다. 다른 채권자들을 희생시키는 거래 구조라는 점에서다. WSJ는 "사모펀드 운용사는 채권자들과 '왕좌의 게임'과 같은 금융 게임을 통해 재정난에 몰린 병든 회사에 대한 소유권을 연장하고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연기할 수 있다"고 전했다. 파산보호 신청으로 법정에서 채무 조정을 하는 대신 채무 관리라는 이름 하에 밀실(백룸)에서 협상이 이뤄진다는 설명이다.
통신업체 알티스,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 랙스페이스 테크놀로지, 항공우주업체 인코라 등 많은 미국 기업들이 현재 이 같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헬스케어 장비업체 엔비젼 헬스케어와 요식업 전문 유통업체 트라이마크 등은 LME를 통해 채무 조정에 성공한 케이스다. 최근엔 안전성을 선호하는 전통적인 기관 투자자들도 LME 채무 조정 협상에 적극 임하고 있다. LME 거래를 설계하거나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투자은행과 로펌도 급증하고 있다.
LME 전략이 급증한 배경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기준 금리가 급격히 인상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금리 상승으로 기업이 부담해야 할 이자 비용이 늘어나면서 사모펀드 운용사의 수익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MSCI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사모펀드의 수익률은 약 6%로, S&P 500의 24%에 비해 낮았다. 즉 사모펀드 운용사가 손실을 만회하고, 소유 기업의 채무불이행을 막기 위해 밀실 협상을 늘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채권단은 선제적으로 연합을 결성하고 "채권단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한 기업의 LME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계약을 맺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배신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사모펀드 운용사 BC파트너스가 2019년 산하 기업 펫스마트의 채무 조정을 위해 LME 전략을 사용하려 했을 때 채권단은 이를 거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대형 채권자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가 이탈을 선언했고, 단 몇 시간 만에 채권단 연합이 무너졌다.
바클레이즈의 신용 애널리스트 코리 쇼트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LME는 앞으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해당 보고서는 LME가 늘고 있는 현상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다. 그는 미국 채권 시장에서 이미 부실화돼 향후 LME 관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채권 및 대출 규모를 약 1550억 달러로 추산했다.
LME는 부실 기업의 회생이나 채권단의 채권 회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S&P 글로벌 레이팅스에 따르면 부실 기업의 35%는 2년 이내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한다. LME 거래는 또한 채권 투자자의 최종 회수율도 악화시킨다. 피치 레이팅스에 따르면 지난해 LME를 시행했던 기업의 파산으로 회수한 금액은 47%에 불과했다. 반면 LME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의 부채 회수율은 평균 60%였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의 사미르 파리크 법학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이런 금융 전쟁은 부실 기업을 회생시키려는 시도로 제시됐으나, 사모펀드 운용사와 기관 투자자에게 추가 수익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