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치부심한 현대차·기아가 새로운 승부수를 준비하고 있다. 힘세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주행거리연장형 전기차(EREV) 기술을 적용한 픽업트럭이다. EREV는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 배터리를 충전하는 전기차다. 현대차·기아는 이르면 2028년 EREV 픽업트럭으로 다시 미국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계획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준대형 세단(155만 대)보다 두 배가량 많은 285만 대나 팔린 큰 시장인 데다 수익성도 높은 픽업트럭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 EREV 픽업트럭 개발
19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는 최근 EREV를 연구하는 ‘xEV 시스템 개발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다. TF 총괄은 양희원 현대차·기아 통합 연구개발(R&D)본부장(사장)이 맡는다. xEV는 현대차가 원래 모든 종류의 차세대 친환경차를 일컫는 표현이었으나, 지난 6월께부터는 EREV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이달 6일 열린 TF 회의에서는 개발 중인 픽업트럭에 EREV를 적용해 출력을 보강하고 주행거리를 연장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현대차는 EREV 픽업트럭(코드명 TE)을 2029년부터, 기아는 EREV 픽업트럭(코드명 TV)을 2028년부터 각각 연간 5만 대 이상 생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목표는 4000㎏이 넘는 무거운 짐을 끌면서도 500㎞ 이상 달릴 수 있는 힘과 주행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픽업트럭을 순수 전기차로 만들어 2026년 출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기차 캐즘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면서 내부 기류가 바뀌었다. 5월 열린 베이징모터쇼에서 중국 전기차 회사들이 EREV 기술을 적용한 차량을 대거 선보인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자동차 회사 리오토는 최대 1050㎞(L7 모델)에 이르는 주행가능거리를 앞세워 지난해 중국에서만 38만 대의 EREV를 팔았다. 베이징모터쇼에서 리오토가 새로 선보인 L6 모델의 주행가능거리는 1390㎞에 이른다.
○테슬라 사이버트럭 분해·분석
현대차 남양연구소는 이를 위해 지난달 말부터 테슬라의 전기 픽업트럭인 사이버트럭을 분해해 분석하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오는 28일까지 분석을 완료한 뒤 관련 TF에서 주요 안건으로 다룰 예정이다. 현대차는 싼타페와 GV70 등에도 EREV를 적용할 예정이다.미국에서 현재 가장 잘 팔리는 픽업트럭 3개 모델은 포드 F시리즈와 쉐보레 실버라도, 닷지 램 픽업이다.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3개 모델 판매량은 지난해 170만 대가 넘었다.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에서 연간 판매한 차량 모두를 합한 것(165만 대)보다 많은 수준이다.
픽업트럭의 대당 판매 수익도 세단보다 많다. 제너럴모터스(GM)가 과거 투자자에게 공개한 대형 픽업트럭 한 대당 수익은 최소 1만7000달러(약 2328만원)로 중대형 세단 판매 수익의 두 배가 넘는다.
현대차는 전기차 캐즘이 예상보다 오래갈 수 있다고 보고 미래 전략을 짜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가격이 기대만큼 빨리 떨어지지 않고 있고 화재 등 안전 문제도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아서다. 업계 관계자는 “한 번 충전으로 1000㎞ 이상 주행할 수 있는 배터리가 싼값에 보급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며 “완벽한 전기차 시대가 오기까지 10여 년간 EREV가 높은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