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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팔아 여배우에게 꽃 선물"…한국 히트곡 된 男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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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서쪽 끝의 작은 마을에, 가난하고 순박한 화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화가는 마가리타라는 이름의 여배우를 사랑했습니다.

마가리타가 화가의 마을에 찾아온 어느 날. 마가리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화가는 집을 팔아 장미를 백만 송이나 샀습니다. 마가리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장미였거든요. 그리고 화가는 그 장미로 마가리타가 머무는 숙소 앞부터 광장까지 온 마을을 뒤덮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그 광경을 본 마가리타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가에게 웃으며 가볍게 키스해 주었습니다. 화가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습니다. 그날 밤 마가리타는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 사랑 이야기는, 1982년 러시아 인기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제목은 ‘백만 송이 장미’. 핀란드·스웨덴·헝가리·일본 등에서도 번안돼 불렸고, 한국에서는 심수봉이 가사를 고쳐 불러 큰 사랑을 받았던, 바로 그 노래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지아의 ‘국민 화가’. 샤갈과 피카소에게도 큰 영감을 줬던,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8살에 고아가 되다
아시아의 서쪽 끝, 러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에 있는 나라 조지아(옛 이름 그루지야). 이 나라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862년, 피로스마니는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작부터 그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8살 때 부모님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거든요.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부잣집에서 피로스마니를 거둬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피로스마니는 자식도 아니고 하인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손님도 아닌 어정쩡한 대우를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하고 불안한 처지. 그 불안감을 피로스마니는 그림에 쏟아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실력도 좋아서 우연한 계기에 그의 그림 실력을 본 화가가 “미술 학교에 가보라”고 권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얹혀사는 처지에 학비가 비싼 미술 학교에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스무살이 된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인쇄소에 취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로스마니는 직장 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과 자기애가 강하고, 걸핏하면 공상에 빠지고, 규칙에 복종하는 걸 참기 어려워하는 예술가 기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년 만에 인쇄소를 그만뒀습니다. 20대 후반이던 1890년, 안정적으로 괜찮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철도청 철도원으로 취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지각과 결근을 밥 먹듯이 했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표가 없어도 태워줬으며, 이를 꾸지람하는 상사와 싸우곤 했습니다. 결국 피로스마니는 4년 만에 쥐꼬리만 한 퇴직금을 받고 철도청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습니다.



그래도 철도원 생활을 하며 피로스마니가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넓은 세상을 누비는 사람들이 피로스마니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그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아마도 피로스마니는, 훗날 자신이 사랑하게 되는 마가리타에 관한 이야기를 이때 처음 들었을 겁니다.
백만송이 장미의 전설
피로스마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 길부터 먼저 마련해야 했습니다. 직장 생활은 싫으니, 남은 건 창업밖에 없었습니다. 가게를 빌릴 돈이 없었던 그는 우유 노점상을 시작했습니다. 피로스마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이런 성실함 덕분에 사업은 꽤 잘 됐습니다. 덕분에 괜찮은 집과 가게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가게 위에는 자신이 직접 그린 소 그림 간판을 걸었습니다. 취업과 퇴사를 반복하고, 창업한 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사실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부업으로 다른 가게의 간판을 그려주고 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품은 꿈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곧 이뤄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사업은 망했고, 그는 완전히 몰락해 버렸습니다. 피로스마니의 삶에 대한 많은 것들이 그렇듯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마가리타라는 여배우에 푹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썼다’, ‘동업자가 그를 배신했다’, ‘친척들이 사업에 끼어들어 가게를 빼앗아 갔다’…. 피로스마니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훗날 저마다 다른 증언을 남겼습니다. 어느 것 하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는 역시 ‘피로스마니가 마가리타에게 장미를 사 주느라 재산을 탕진했다’는 버전입니다. 실제로 마가리타라는 배우가 피로스마니의 동네를 방문했고, 마가리타를 사랑했던 피로스마니가 꽃 선물을 한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러시아의 ‘백만 송이 장미’ 가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화가는 꽃을 사랑하는 어느 여배우를 사랑했다네/자신의 집과 그림들을 팔아 그 돈으로 바다만큼의 꽃을 샀다네/.../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당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꽃과 바꾸어 버렸다네/.../화가는 외로운 삶을 살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견뎌야 했네/하지만 그의 삶에는 꽃으로 가득 찬 광장이 있었다네.’



무슨 이유였든, 피로스마니는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어느덧 40대가 된 피로스마니. 성실하게 일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그의 손에 남은 건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피로스마니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 이건 운명이다. 지금이야말로 평생 바라던 화가의 꿈을 이룰 때야.’
그림을 그리다, 본능적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는 피로스마니의 ‘방랑 화가’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선술집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줬습니다. 가게 간판이나 벽화도 그렸습니다. 레모네이드 가게에서 쓰는 수레를 물감으로 장식해 달라는,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도 그는 군말 없이 맡아 했습니다.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무엇이든 해야지요. 가장 고상한 그림을 그리려면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해야 합니다.” 피로스마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많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돈으로 받는 건 재료비뿐. 여기에 더해 와인과 음식이면, 그림값으로 충분했습니다.




피로스마니는 그림을 굉장히 많이 그렸습니다. 평생에 걸쳐 그린 그림은 총 2000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업 속도도 빨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재료만 주시면 두세 시간 안에 원하는 그림을 그려드릴게요. 저한테는 쉬운 일이에요.” 그의 작업 과정을 기억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과장을 조금 섞어 증언했습니다. “피로스마니가 모델을 한 번 쳐다보고,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재빨리 붓질하고, 또 한 모금 마시고 나면 그림이 완성돼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대충 빨리 그린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피로스마니가 자신의 형편에 맞지 않는 수입산 최고급 재료를 썼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캔버스 역할을 하는 특유의 검은 유포(油布), 프랑스산 최신 물감을 사기 위해 저축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피로스마니가 남긴 작품들은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경우가 많은데도 비교적 색채가 선명합니다.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가족, 사람들의 축복 속에 치러지는 전통 결혼식,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벌이는 축제…. 그는 자신이 평생 봐온 것들, 간절히 원했으나 갖지 못했던 것들을 그렸습니다. 동물도 그가 즐겨 그리는 주제였습니다. 사자를 비롯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동물은 피로스마니가 생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사는 동안 조지아에는 동물원도, 서커스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피로스마니는 목판화 등 그림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동물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독특한 상황에서 나온 그림이기에 피로스마니의 작품들은 다른 어떤 그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매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검은색 바탕에 밀도 높은 물감으로, 최소한의 획과 색만 효율적으로 사용해 그린 그림들. 아시아와 유럽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아 발전한 조지아 문화의 고유한 분위기가 작가 특유의 순수성과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강렬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미술 교육도, 다른 화가의 영향도 받지 않고 인간 본연의 예술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미술사가들은 피로스마니의 작품을 ‘소박파’로 분류합니다. 실제로 피로스마니의 작품(위)은 같은 소박파에 속하는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아래쪽)의 작품과도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두 화가가 생전 서로를 알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요. 하지만 피로스마니의 그림은 루소의 그림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루소와 달리, 피로스마니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못 배웠다는 이유로
그런 피로스마니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드리우는 순간은 있었습니다. 피로스마니가 50대에 막 접어들었을 때, 우연한 계기로 그의 작품이 미술계에 소개되면서 본격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화가가 조지아에 있었다니!” 조지아 미술계에서 그의 이름은 금세 유명해졌습니다. 1913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샤갈과 말레비치 등 대가들이 참여한 전시에 함께 작품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 3월,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예술가 협회의 창립 회의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옷을 입고 회의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회의는 피로스마니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대부분이 부유층 출신이었던 참석자들은 예술 이론 논쟁의 탈을 쓴 정치 싸움에만 몰두했습니다. 협회와 조지아 예술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야기를 듣던 피로스마니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말씀이 없으셨군요.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피로스마니는 입을 뗐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무로 만든 커다란 집입니다. 그곳에 큰 테이블과 찻주전자를 마련하고, 모두 모여 차를 많이 마시고, 그림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좌중에서는 비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답군. 아무것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정곡을 찔려 내심 불쾌해하는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회의는 끝났습니다.

회의 이후, 피로스마니의 작품은 조지아 예술가 협회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습니다. 협회는 그의 공식 전시회를 열어주지도 않았고, 다른 화가들이 받는 재정 지원을 그에게 주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가장 심했던 일은 회의가 열린 몇 주 후 일어났습니다. 익명의 화가가 지역 신문에 그린 만평 속에서, 형편없는 얼굴과 차림새의 피로스마니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고상한 미술 평론가는 뒤에서 그 모습을 비웃고 있었지요. 이 만평을 접한 피로스마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성격은 급속도로 어두워졌고, 술도 늘었습니다.

기린 한 마리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1차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경기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술을 파는 가게들이었습니다. 선술집에서 친구를 사귀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주점의 간판을 주로 그렸던 피로스마니에게는 여러모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생활고와 추위에 시달리며 길거리를 헤매고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실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1918년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56세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 조지아 미술계의 철저한 배척을 받았던 피로스마니는 지금 조지아에서 ‘국민 화가’로 대접받습니다. 얼굴 그림이 조지아 지폐에 등장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중섭이나 박수근이 차지하는 위상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더 놀라운 건, 조지아라는 곳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는 겁니다. 어지러웠던 조지아의 역사, 열악한 보존 상황, 많지 않은 자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오늘날 피로스마니의 생애와 작품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유럽 중심부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서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고, 방문객이 40만 명에 달했습니다. 세계 양대 경매사인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는 그의 작품이 수십억원 대에 낙찰됩니다. 대부분 작품이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있어서 좀처럼 경매에 나오지는 않지만요.



인기의 이유가 뭘까요. 피로스마니가 그린 이 기린 그림을 생각합니다. 그는 그림 속 기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신비롭지만 황폐한 평원. 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기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상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고독한 존재. 비율이 맞지 않아 누가 봐도 어색하고, 때로는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기린은 비통한 눈을 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봐도 이 작품은 투박합니다. 친숙한 나라나 풍경, 복장,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린을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꾸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피로스마니의 그림에는, 비록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사람의 마음 근원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강렬함이 있습니다. 유명한 학교에서 공부하고, 대단한 기관에서 전시하고, 예술계에서 극찬받는 화가들의 작품에서조차 쉽게 느끼기 어려운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는 바보 같아 보일 만큼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집을 팔아서 장미 백만 송이를 선물했다는 전설이 사실로 믿길 만큼요.

그래서 피로스마니의 작품은 설명과 이해가 필요 없습니다. 그림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해 보이는 현대미술에 피로감과 거부감을 느끼고, 의미 없는 말과 이미지들이 날아다니는 어지러운 세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어쩌면 피로스마니의 작품은 훌륭한 치료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피로스마니의 삶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 증언과 구전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올 뿐입니다. 이번 기사는 피로스마니의 삶에 관해 가장 권위있는 연구서인 Edward Kuznetsov의 'Niko Pirosmani', 알베르티나 박물관 전시 카탈로그인 Niko Pirosmani(Bice Cruiger 지음)를 주로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i>**‘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은 1981년 라트비아 가요인 ‘마라가 준 인생’입니다. 다만 러시아에서 이 노래를 번안하면서 피로스마니의 이야기를 주제로 새로 가사를 썼고, 이 버전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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