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간)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 동메달 결정전이 열린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우크라이나의 ‘펜싱 영웅’ 올하 하를란(34)은 승리가 확정되자 피스트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그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새겨진 마스크에 입을 맞췄다. 2년 넘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이번 대회 첫 메달을 획득한 순간이다.
이날 하를란은 한국의 최세빈(24)을 15-14로 꺾었다. 한때 최세빈에 5-11까지 뒤졌지만, 매서운 추격을 펼친 끝에 14-14 동점을 만든 뒤 마지막 공격이 비디오판독 끝에 인정되면서 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하를란이 울음을 터트리자 현장에 있던 우크라이나 관계자와 취재진도 함께 울었다. 관중들은 그의 이름인 “올하”를 연호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하를란의 동메달은 2022년 2월 러시아가 영토를 침공한 이후 첫 번째 올림픽에서 거둔 첫 번째 메달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대회에 25개 종목 143명의 선수를 파견했는데, 러시아의 공습을 피하고자 비행기 대신 기차를 이용했다. 하를란은 “금메달보다 더 값지다”며 “조국을 위한 메달이고,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메달”이라고 기뻐했다.
하를란은 2008년 베이징 대회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단체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우크라이나 펜싱 영웅이다. 2012년 런던 대회와 2016년 리우 대회 개인전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엔 출전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악수 거부’ 사건 때문이다.
하를란은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 64강에서 15-7로 이기고도 실격 판정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침공한 러시아 선수와는 악수하지 않겠다”며 상대 선수 안나 스미르노바(러시아)와 악수를 거부했다. 손 대신 펜싱 칼을 내민 그에겐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선수권 성적보다 조국의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특수 상황’을 고려해 하를란에게 추가로 출전권을 보장하기로 하면서 극적으로 이번 대회에 나설 수 있었다.
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