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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마다 평가기준 '덕지덕지'…공기업 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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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기업 등 공공기관 327곳은 매년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에 따라 경영평가를 받는다. 평가 항목은 공공기관 규모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100개 안팎에 달한다.

문제는 정권마다 경영평가 배점이 크게 바뀐다는 점이다. 각 정부가 국정과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공공기관을 활용해서다. 이 과정에서 실현 불가능하거나 이전 정권과 양립 불가능한 새 정권 평가 항목이 덧대지며 경영평가 지표가 누더기가 됐다고 공공기관들은 하소연한다. 각 공공기관이 매년 조달품의 5%와 3%를 여성 기업과 사회적 기업이 만든 제품을 쓰도록 한 ‘상생·협력 평가 항목’이 대표적 사례다. 사회적 책임을 중시한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한 것인데 공공기관은 15년 넘게 매년 머리를 싸맨다. 국내 여성·사회적 기업 제품 시장 규모가 수백억원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철도, 도로 등 전문 기자재를 조(兆) 단위로 사들이는 대형 공기업은 애초부터 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100개 넘는 공기업 평가지표…실사 준비하다 1년 다 간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공공기관의 경영평가 배점은 크게 바뀐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적 책임을 중시했다. 여성과 장애인 채용, 중소기업과 장애인 기업의 제품 구매에 적극적인 공공기관에 가산점을 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효율성에 초점을 두고 공공기관 부채를 집중 관리했다. 문재인 정부는 다시 사회적 가치를 강조했고, 윤석열 정부는 경영 성과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공공성·효율성 ‘두 마리 토끼’ 잡아라
29일 한국경제신문이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2022년)와 윤석열 정부 1년 차(2023년)의 경영평가 항목을 비교·분석한 결과 1년 만에 경영평가의 무게 추가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쪽에서 경영 효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의 경영평가 항목은 상생협력 및 지역발전(4점), 직원 복리후생(4점), 혁신계획 성과(3점) 등의 배점이 높은 게 특징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항목의 배점을 낮추는 대신 영업이익률(2점), 노동생산성(3점), 조직·인적 자원관리(2.5점) 등 경영 효율성과 관련한 점수 비중을 높였다.

공공기관 경영평가 담당자는 “같은 그룹의 공공기관은 상대평가를 받는 데다 소수점 한 자리 차이로 등급이 갈리기 때문에 배점이 1점 바뀌는 건 엄청난 차이”라고 말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정책 목표에 맞춰 새로운 평가 항목을 추가하더라도 이전 정권이 늘려놓은 항목을 없애지는 않는다. 대신 배점만 줄인 채 유지한다. 공공기관이 한없이 늘어나는 경영평가 항목에 허덕이는 이유다.

이전 정권의 평가 항목에 새 정권의 항목을 덧대는 ‘누더기 경영평가’는 양립할 수 없는 평가 항목을 양산해 공공기관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

상생협력과 복리후생처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항목과 영업이익률, 노동생산성 같은 효율성 항목이 배점만 바뀐 채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늘어나는 것이다. 한 공공기관 사장은 “무료 급식소에 돈도 많이 벌라고 요구하는 격”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 정부는 새로운 평가 항목을 추가하는 동시에 기존 항목을 합쳐 평가 항목이 끝없이 늘어나는 것을 교묘히 감춘다. 이전 정부에서 별도 평가 항목이던 ‘리더십’과 ‘전략기획’을 새 정부가 ‘리더십 및 전략기획’으로 통합하는 식이다. 그런데도 올해 대형 공기업의 경영평가 세부 항목은 100개가 넘는다.
공공기관 경쟁력 갉아먹는 경영평가
정권 입맛대로 바뀌는 평가 기준은 공공기업이 경쟁력을 끌어올릴 여력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무지표 악화를 감수하고 신입사원 채용을 늘리는가 하면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정책에 보조를 맞춘다며 불필요한 자회사를 세워 청소 용역 직원을 정규직으로 뽑는 공기업도 있었다.

현행 공공기관운영법 경영평가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잘하는 공공기관이 더 잘하도록 이끄는 동기부여를 못 한다는 점이다. 올해 공공기관 예산운용지침은 2024년 총인건비 예산을 지난해의 2.5% 이내에서 늘리도록 제한했다. 그런데 해당 공공기관의 평균 임금이 해당 산업 평균 임금의 110% 이상이거나 공공기관 평균의 120% 이상이면 인건비 증액분을 2% 이내로 깎았다.

매년 우수한 평가 등급을 받아 연봉 수준이 높아진 공공기관은 연봉 인상률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한승준 서울여대 사회과학대 학장은 ‘공공기관 개혁’ 보고서를 통해 “정부 편의적인 평가 항목 신설에 따른 공공기관의 인력과 예산 낭비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정부 권장 정책을 실행하느라 조직 본연의 업무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환/정영효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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