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위기의 불씨
선명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2012년 표심을 노린 국회는 ‘부실 저축은행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급조해 들고나왔다. 문을 닫은 저축은행에 5000만원 이상 예금한 고객이 입은 피해액 중 55%까지 물어주자는 법안이었다. 예금자보호법(5000만원까지 보호)을 무력화하는 조치였다. 당시 김 위원장은 온몸으로 법안 통과를 막아냈다. 정치인의 표 욕심을 맞춰주기 위해 금융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그는 사석에서 종종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위기가 닥칠 거라는 걸 안다면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메시지다. 2013년 퇴임한 그를 다시 소환해낸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선 늘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은 이미 빚에 포위돼 있다. 가계 기업 정부의 빚을 합한 수치만 6000조원(작년 말 기준)을 넘어선 상태다. 코로나19 사태 때 빚을 낸 자영업자들은 수년간 고금리·고물가에 허덕이다 거리에 나앉기 직전이다.
빚으로 버텨온 기업들은 구조조정의 시대를 맞았다. 올해 초 태영건설의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 개선작업)이 서막이다. 앞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건설사와 금융회사가 쓰러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직접 총대 메고 뛰어야
석유화학 등 일부 업종에선 대기업들도 사업 조정에 들어갔다. 재계 서열 2위인 SK는 그룹 차원의 사업 재편을 추진 중이다. 현금성 자산 90조원을 손에 쥔 ‘천하의 삼성’도 산업은행에 대출 한도와 금리를 타진했을 정도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들의 몸부림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다.불확실성의 시대다. 그런데 우리 경제팀엔 대책반장이 보이지 않는다. 수술대를 펼치고 집도(執刀)해본 이가 별로 없다. 현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와 금융위원장 등은 경제·금융 전문가지만 ‘험한’ 일과는 거리가 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정책실장은 교수 출신이고, 경제수석은 예산 전문가다. 검사 출신인 금융감독원장이 경제 현안의 총대를 멘 모양새지만 ‘정책 호위무사’에 가깝다.
그렇다고 ‘칼잡이 이헌재(외환위기 시절 금융감독위원장)’나 ‘옛 대책반장 김석동’을 다시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침 소폭 개각을 했다. 구조조정 일을 해본 차기 금융위원장이 직접 총대를 메야 할 때다. 회의하고 사진 찍는 ‘장관 놀이’할 생각은 접어두시라. PF 연착륙 및 가계부채 축소, 기업 구조조정 등 복잡다단한 현안의 주도권을 쥐고 뛰어야 한다. 스스로 대책반장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