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음악 작곡까지 척척 해내고 있다. PC나 스마트폰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누구나 손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원하는 장르를 선택하고 ‘즐겁게’ ‘쓸쓸하게’ 식으로 키워드를 넣으면 자동판매기처럼 음악 하나가 뚝딱 나온다. 곡의 분위기나 리듬 같은 것을 재차 수정할 수도 있다.
1년 전쯤 재즈 음악을 하는 후배로부터 “AI로 영화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소 녹음 장비와 뮤직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더니 누구보다 먼저 AI를 활용하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급할 때 힌트를 얻는 정도”라고 하는데 작곡의 모티프를 얻을 때 유용해 보인다.
그렇다면 AI가 재즈 연주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 얼마 전 방송된 TV 다큐멘터리에서는 재즈 뮤지션과 AI가 한 무대에서 맞서는 상황을 연출했다. 촬영한 장소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현장. 무대를 커튼으로 가리고 관객들이 A와 B 중 어떤 쪽에 호감을 느끼는지 판정해 보는 블라인드 테스트였다.
관객의 선택 결과는 비슷하게 갈렸는데 인간의 연주 쪽을 택한 비율이 좀 더 높았다. AI가 즉흥 연주까지 실행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재즈의 핵심인 스윙 리듬과 싱커페이션(당김음)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게 놀라웠다. 테스트에 참여한 뮤지션들도 ‘AI의 연주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큐 프로그램은 AI와 재즈를 소재로 삼고 ‘예술이 사라진다’는 부제목을 달았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작곡을 하니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재즈는 본질적으로 ‘라이브 필링(Live Feeling)’ 음악이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무드이며 감정이다. 그런데 AI는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소리에 온도가 느껴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변주나 의외의 센스가 불가능하다.
결국 AI는 음정은 알아도 감정은 모른다는 점이 숙제가 될 것이다. 슬프거나 기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패턴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직 멀었다. 맹렬하게 질주하는 피아노 속에도 슬픔의 뉘앙스가 있는 게 재즈이기 때문이다.
꼭 AI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사람의 음악을 대신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동 연주 피아노(player piano)는 스스로 건반을 연주하고 신시사이저는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생산하니 경제적 효율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방법이 등장해도 음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이 악기를 연주하고 그 손끝에서 전이되는 음들이 마음을 움직인다. 재즈피아니스트 델로니오스 몽크는 “새로운 음이라는 건 없다. 모든 음은 건반 위에 늘어서 있다. 그러나 어떤 음에다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은 다르게 울려 퍼진다. 진정한 음악이란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것”이라고 했다.
콘서트장에 가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여름에 가까운 이즈음이면 여기저기에서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 며칠 전 나도 마리아 킴의 ‘피아노 앤드 보컬’ 콘서트에 다녀왔다. 이날 그녀의 밴드는 1960년대 모던재즈를 선보였다. 1960년대라니. AI가 재즈를 연주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콘셉트 같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반응은 뜨거웠다.
재즈 팬들에게 과거의 것은 곧 본질이고 재즈다운 재즈가 공감의 장을 만든다. 무대 위 연주자들은 상대의 마음을 읽고 순간순간 대응한다. 어떤 찰나에서는 길을 잃은 듯싶다가도 다시 합을 이룬다. 그때마다 관객은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이런 건 AI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