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에서 음악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연주자에게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국제적 권위의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극찬한 주인공은 대만계 호주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35).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레이 첸은 결점 없는 기교와 섬세한 표현으로 2008년 예후디 메뉴인 국제콩쿠르, 2009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한 스타 바이올리니스트다. 이후 소니, 데카 같은 명문 음반사를 통해 활동한 그는 2011년 독일을 대표하는 음반상인 에코 클래식 상을 안았고 2017년엔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30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한국을 찾았다. 28~29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바실리 페트렌코)과 ‘4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두 작품인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차례로 협연하기 위해서다. 레이 첸은 26일 서울 롯데 시그니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한 단독 인터뷰에서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 협주곡엔 그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며 “나이가 들면서 더 깊이, 제대로 이해하게 된 이들의 심경과 감정을 나만의 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줄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부유하게 산 멘델스존의 작품에선 유려한 흐름과 발랄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기운, 우아한 색채가 두드러지고 동성애 등의 이유로 평생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차이콥스키의 작품에선 격렬한 악상과 극적인 표현, 풍부한 서정이 곡 전체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선율이지만 제 연주에선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를 보면 연주 활동에만 몰두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그는 누구보다 소통에 진심인 ‘21세기형 예술가’다. 눈코 뜰 새 없는 숨 가쁜 일정에도 틈틈이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영상과 글을 올리며 활발히 대중과 교류한다. 뉴욕타임스가 ‘뉴미디어를 활용해 클래식 음악에 젊은 청중을 불러 모으는 음악가’란 주제로 그를 집중 조명했을 정도다. 레이 첸은 아마추어·프로 연주자가 각자의 연습 영상을 자유롭게 올리고 공유하는 클래식 앱 ‘토닉’의 공동 설립자로도 유명하다.
소셜미디어 활동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묻자 그는 “나의 목표는 저명한 공연장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 대단한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3000여 명의 관객에게 음악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술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과 음악을 나누는 기회도 제겐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절 진짜 행복하게 하는 건 개인적인 성공이 아니라 음악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연결고리와 무형의 가치란 것을요.”
레이 첸이 사용 중인 1714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돌핀’(닛폰음악재단 지원)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쓴 명기로 유명하다. “돌핀은 제가 쓴 어떤 악기보다 다루기 어려운 바이올린이지만 무척 고결한 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 잡았을 땐 소리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들렸는데 열네 번째 연주가 돼서야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소리를 들려주더군요. 하이페츠가 이 악기를 선택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죠.”
경쟁이 치열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세계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는 것, 힘들 때는 없을까. 질문을 듣고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인 그는 “물론 쉽지 않다. 그렇지만 오히려 어려움이 없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지 않나. 쉬운 게임은 빨리 질려버리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어렸을 땐 1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극심한 연주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콩쿠르에 도전하고 큰 무대에 오를 때마다 내가 원한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무조건 배우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턴 모든 게 좋은 경험처럼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전 계속 어려움에 부딪힐 겁니다. 위험을 감수할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