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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 버틴 붓질…한국미술을 지켜낸 힘, 구상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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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고 질서 있는 선, 과하지 않은 색과 충분히 이해 가능한 조형 개념. 붓을 든 이의 개성있는 시선을 담되, 인물과 풍경, 사물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펼쳐내는 구상(具象)의 미학은 한 마디로 착실하다.

미술의 출발점이 자연과 일상에서 느낀 모든 감각과 사유를 재현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구상은 회화의 기본이다. 21세기 동시대 미술에서 구상과 추상(抽象)의 경계가 흐릿해졌지만, 지난 세기 한국 미술사를 톺아보면 구상회화는 추상회화와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면이 있다. 민중미술로 익숙한 한국 구상회화는 미니멀리즘, 단색화로 일컬어진 한국 추상회화의 연쇄적 파상공세에 밀려났다. 화단의 대세가 추상으로 굳어지고 대중의 취향과도 멀어지면서 극복해야 할 장르로 여겨지기도 했다.

구상은 구시대적인 걸까. 여기 ‘건어장’이라는 제목의 그림 한 점이 있다. 생선을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물감을 두텁게 올린 표현이 재미있다. 투박하고 강한 붓질과 묵직한 질감에선 유년 시절 관찰한 자신의 기억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구상화가 김태(1931~2021)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그 자체의 인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관찰자가 보다 쉽고 친근감 있게 그림을 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김태의 철학을 함께 떠올린다면 구상은 독자적인 영역의 그림이자 한국회화의 토양을 다진 표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 구상 이끈 별들, 과천에 모였다
어렴풋했던 한국 구상회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지난달 21일부터 시작된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 기획 전시다. 1960년대 이후 추상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키워낸 작가들의 소중한 작품 150여 점이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에 걸렸다.

전시에 출품된 작가는 33명으로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우리 풍토와 체질에서 공감’하는 회화가 한국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란 생각으로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등 전국 명산을 다니며 그린 그림으로 ‘산의 화가’라 불렸던 박고석(1917~2002)과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인 소를 즐겨 그려 ‘소의 작가’란 별명을 가졌던 황유엽(1916~2010) 등이 대표적이다.

전시는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1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통해 아카데미즘 미술의 초석을 다진 1세대 유화 작가들이 중심이다.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계승한다는 목표로 1958년 결성된 목우회(木友會) 창립 멤버인 이종우(1899~1981), 이병규(1901~1974), 도상봉(1902~1977), 김인승(1910~2001)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국전 초대 작가인 이병규의 ‘고궁일우’는 싱그러운 기운을 물씬 품은 유화 작품이다. 녹색을 주색으로 만들어낸 다양한 색채와 은은한 빛, 보색의 병치로 색의 선명성을 강조한 그림의 공간감이 깊다. 역동적인 풍경이 아닌 다소곳한 정물을 다룬 도상봉의 ‘백일홍’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다각 항아리의 명암을 극대화한 점에서 이병규의 작품과는 또 다른 깊이감을 준다. 사실적이고 묘사력과 비례감각이 뛰어난 김춘식(1947~)의 ‘포구(浦口)’는 바다를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인물의 담담한 표정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1부가 한국 구상회화의 시발점이라면 2부는 시대 변화 속 구상과 비구상 완충지대에 속해 있던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소개된다. 1967년 구상전(具象展)을 발족한 작가가 다수 소개되는데, 기존 아카데믹한 양식의 틀을 깨고 독자적인 회화 질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장욱진(1917~1990), 박수근(1914~1965)과 함께 방탄소년단(BTS) RM이 사랑하는 작가인 윤중식(1913~2012)의 작품이 반갑다.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담은 ‘소년과 정물’부터 구도가 독특한 회화인 ‘금붕어와 비둘기’ 등이 나란히 걸렸다.
‘기증 열풍’ 미술 애호가는 즐겁다
기존 화단에 이름을 알렸던 작품뿐 아니라 작가들의 숨은 명작까지 다수 출품된 이번 구상회화전이 특별한 이유는 기증으로 만들어진 뜻깊은 전시라는 데 있다. 예컨대 이병규와 윤중식의 경우 ‘이건희컬렉션’으로 각각 5점, 4점이 기증된 후 유족들이 각각 13점, 20점을 기증했다. 김태의 회화 역시 대거 기증돼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국내에선 3년 전 ‘세기의 기증’으로 불리는 ‘이건희컬렉션(1488점)’을 시작으로 ‘동산박주환컬렉션(195점)’ 등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대거 유입됐다. 작가, 작가 유족, 개인 소장가들이 기증 의사를 밝히면서 미술 향유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1560점 중 기증 작품은 전체 55.6%인 6429점을 차지한다. 미술관 연간 구입 예산이 50억원을 밑도는 상황인 터라 기증 작품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희소가치가 높은 근대 미술작품은 한정된 미술관 예산으론 구입하기 어렵다”며 “이번 전시는 한국 미술의 자양분이 됐다”고 밝혔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과천=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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