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신규 직원을 채용하면서 학벌, 학점, 영어 점수보다 직무 관련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실무 경험 없이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의 취업문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렇다 보니 대학 졸업을 전후로 ‘직무 관련 경험’부터 쌓는 게 새로운 스펙이 되고 있다. 이른바 ‘중고 신입’ 시대다.
직무 경험 없으면 취업 ‘언감생심’
“채용 면접 때 직무 관련 경험을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렇다 할 경험이 없어서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 후 제게는 질문을 거의 안 하더라고요.”지난달 20일 서울 사근동 한양대 신소재공학관에서 만난 우재형 씨(24)가 한 말이다. 이날 우씨는 글로벌 산업 자동화 솔루션 기업 한국훼스토가 시행하는 ‘프로젝트형 미래내일 일경험 사업(일경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전남 광양에서 올라왔다. 지난해 시작된 일경험 사업은 민관이 협력해 미취업 청년에게 일경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우씨처럼 현장의 채용 트렌드 변화에 맞춰 일경험 기회를 찾아 나서는 청년이 늘고 있다. 일경험은 학벌, 전공, 영어 점수 등을 제치고 기업이 채용 시 가장 눈여겨보는 요소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1월 100인 이상 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 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를 설문조사한 결과 ‘직무 관련 업무 경험’이 74.6%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어 ‘인성·태도’(9.4%) ‘직무 관련 전공’(6.2%) ‘자격증’(5.4%) 순이었다.
기업들이 일머리를 갖춘 ‘즉시 전력감’ ‘중고 신입’을 선호하면서 채용 흐름도 변하고 있다. 경총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은 향후 채용 방식으로 신입 정기 공채 대신 ‘수시 특채’(81.6%·복수응답)와 ‘경력직 채용’(70.8%)을 확대할 계획이다. 직무 경험이 없는 ‘생짜’ 대졸 신입이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일경험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해 취업난을 뚫는 청년도 증가하고 있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나온 유성훈 씨(25·가명)는 복학 이후 졸업을 앞두고 여러 기업의 인턴십에 도전했지만 일경험이 부족한 까닭에 참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후 취업 동아리에서 일경험 프로그램을 알게 된 그는 고민 끝에 C사가 운영하는 ‘미래도약 실무 인턴십’에 참여했고, 수료 직전 C사의 제안을 받아 계약직 입사를 앞두고 있다. 유씨는 “과거에 경력 쌓기 목적으로 참여했던 일반 기업의 ‘서포터스’보다 현업을 더 잘 경험할 수 있었고 전담 멘토가 코칭까지 해줬다”며 “수료까지 힘들었지만 얻어가는 게 많아 다른 친구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 진짜 적성, 일경험으로 확인
지난해 8월 지방대 문과대를 졸업한 김선민 씨(26·가명)는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경력이 회사와 무관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 10월 ‘사무 행정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해 교육받던 중 회사 관계자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아 같은 해 12월 일경험 교육을 맡은 회사에 곧바로 입사했다.정부가 인공지능(AI)·빅데이터·반도체 등 디지털 신기술 분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K디지털 트레이닝(KDT)’ 사업도 일경험 쌓기에 최적화돼 있다.
대학에서 일본사를 전공한 김유안 씨(29·가명)는 취업 시장에서 고전하던 중 막연히 ‘웹 개발’이 유망하다는 소식에 독학을 시작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친구에게서 KDT를 알게 돼 6개월간 ‘실무형 AI 웹 개발자 양성 과정’에 참여한 그는 웹 개발 기초부터 배운 뒤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다. 좋아하던 일본어 실력을 활용해 그는 현재 일본 정보기술(IT) 기업에서 백엔드 개발자로 근무 중이다.
일경험이 취업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취업 경로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일경험 프로그램을 수료한 윤석민 씨(28·가명)는 “기업에서 막연히 하고 싶던 일을 경험해 봤지만 적성이 아니란 걸 깨달아 경력 전환을 준비 중”이라며 “일경험을 통해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힌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