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회사뿐 아니라 주주를 포함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 작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27일과 28일 하루 간격으로 기업 밸류업을 위한 핵심 방안으로 상법 개정을 시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가 이 같은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지 4개월 만에 정부 입장이 바뀐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제시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상속세 개편을 앞두고 거대 야당을 설득하기 위한 이른바 ‘트레이드 카드’로 정부가 상법 개정을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소액주주 권리 법제화
정부가 개정 검토에 착수한 현행 상법 제382조의3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부는 여기에 회사뿐 아니라 주주를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사가 회사만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것이다.그동안 소액주주뿐 아니라 기관투자가도 이 상법 조항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예컨대 LG화학이 2021년 LG에너지솔루션을 물적분할해 상장하면서 LG화학 주주들이 주가 하락으로 손실을 본 것과 같은 사례를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윤 대통령도 지난 1월 2일 열린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하도록 상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자 경제계를 중심으로 소액주주가 충실의무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고소·고발이 남발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는 2주 후인 같은 달 17일 이사의 충실의무 강화 방안을 상법 개정에 반영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기업 밸류업 강화를 위해선 주주의 권리 보호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는 것이 기재부 설명이다. 대통령실은 이달 초 법무부, 기재부와 회의를 열고 상법 개정을 검토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활동 위축” 재계 반발
경제계는 정부 입장 변화에 당혹해하고 있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강화가 법제화되면 기업의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소액주주들의 배임죄 등 소송이 남발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형법에 업무상 배임죄가 있는 국내 현실에서 이사 역할 축소, 단기 위주 경영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며 “이는 결국 장기적인 기업가치 훼손을 불러와 회사와 주주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경영상 판단에는 손실이 나도 면책하는 조항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현실적으로 모든 주주를 위한 의사결정도 불가능하다는 게 재계 설명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대주주를 제외하더라도 연기금 등 장기투자자, 수개월 투자하는 스윙투자자, 단타매매를 하는 투자자까지 주주가 천차만별”이라며 “신규 투자를 한다고 하면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사결정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회사와 주주의 법인격(권리·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별개로 보는 상법 체계를 뒤흔들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를 추가하면 회사와 주주가 동일하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 밸류업을 위해 상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입장이다. 최 부총리는 지난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방안이 있기 때문에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고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상속세 개편을 앞두고 거대 야당을 설득하기 위해 상법 개정을 새 카드로 제시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사 의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은 야당도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21대 국회에서 똑같은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용우·박주민 의원)을 발의했다.
강경민/선한결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