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 전자업계를 호령했던 일본 샤프가 결국 TV용 액정 패널(LCD) 생산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1991년 양산을 시작한 이후 LCD 부문 누적 적자가 총 1조9000억엔(약 17조)을 넘어선 탓이다.
샤프는 ‘거북이 산(가메야마 LCD 공장) 모델’로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해외 업체와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이미 중국의 패널 생산능력은 일본의 10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너무 늦은 철수다.
“자, 액정의 시대로”
18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00년 방영된 TV 광고에서 샤프는 일본 국내에서 판매하는 모든 TV를 액정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광고 모델이 브라운관 TV를 보자기에 싸고, 액정 TV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20세기에 두고 갈 것, 21세기에 가져갈 것”이라고 말하는 이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액정의 샤프’를 깊이 각인시켰다.
평면 TV의 보급으로 늘어난 수요를 포착한 샤프는 성장했다. 패널 생산부터 조립까지 일관하는 가메야마 공장을 2004년 가동하면서 ‘세계의 거북이 산 모델’로 인기를 얻었다. 2007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순이익은 1019억엔(약 9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년 전 글로벌 전자업계는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평면 TV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였다. 삼성전자, 중국 BOE 등이 잇따라 공장을 세우고 공세를 펼치면서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은 열세에 놓였다.
‘종합 전자’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던 일본 업체들은 다른 사업부와의 형평성 탓에 TV에만 투자를 집중할 수 없었다. 각 회사는 규모의 열세를 기술로 만회하려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파나소닉과 소니는 2016년까지 TV용 패널 생산에서 철수했다.
국내 업체 사정도 다르지 않다. LG디스플레이는 중국 광저우 공장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공장은 LG디스플레이의 마지막 남은 TV용 LCD 패널 생산 설비다. 매각이 마무리되면 LG디스플레이는 LG반도체 시절부터 27년간 이어진 LCD 부문을 정리하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사업 모델을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다.
샤프 CEO는 지난 14일 온라인 간담회에서 “백색가전 등 브랜드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전자업계에선 “액정 패널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샤프는 9월부터 TV용 대형 패널을 생산하는 사카이 공장의 가동을 중단한다. 스마트폰용 중소형 패널을 생산하는 가메야마 공장의 생산능력을 올해 30% 줄이고, 미에 공장의 생산능력을 절반으로 줄일 계획도 세웠다.
샤프는 1991년 최초의 액정 패널 전용 공장인 텐리 공장을 가동한 이래 30년 이상 액정 패널 사업에서 총 1조9600억엔의 적자를 냈다. 경영 악화 탓에 결국 2016년에는 대만 홍하이정밀공업(폭스콘) 산하로 들어갔다. 파나소닉 등이 철수한 뒤에도 일본에서 유일하게 TV용 패널을 생산한 배경에는 샤프의 브랜드 파워를 높게 평가한 홍하이의 의도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DSCC에 따르면 2023년 TV용 LCD 패널 시장 세계 점유율(금액 기준)은 BOE가 26.5%로 1위다. 5위인 샤프(7.9%)의 세 배가 넘는다. DSCC는 일본과 중국의 TV용 패널 생산능력은 15배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샤프는 사명이 하야카와전기공업이던 1964년 일본 최초로 계산기를 출시했다. 카시오 계산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의 액정 및 반도체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액정 패널 사업을 포기한 시기는 잘못됐지만, 날카로운 기술로 존재감을 높인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며 “시대를 여는 신제품 개발이 실적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