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마지막 F 음의 여운이 수초간 지속됐다. 음의 잔향이 완벽히 사라지자 비로소 공연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커지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순식간에 폭발했고 그때야 꿈결 같은 시간이 현실로 돌아왔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슈만 ‘트로이메라이’ 얘기다.
꿈이라는 뜻의 ‘트로이메라이’처럼 이번 공연은 음악 팬들이 꿈꿔온 조합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음악가 정명훈(71)과 조성진이 각자의 기량과 커리어 모두 원숙해진 시점에 손을 맞췄다는 점에서다. 한국 청중 모두에게 ‘최고의 음악가’로 각인된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를 한 무대에서 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1부에서는 조성진이 슈만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를, 2부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을 들려줬다.
조성진은 작년 11월 독일 명문 악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GO)의 내한 공연에서 같은 곡으로 협연한 바 있다. 두 악단의 색이 워낙 다른 만큼 지난번과 사뭇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LGO와의 연주에서는 두 가지의 다른 색채가 충돌하며 에너지를 내뿜는 음악을 들려줬다면 도쿄필하모닉과는 ‘하모니’에 방점을 찍은 듯했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긴밀한 호흡이 중요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조성진은 프레이징의 시작과 끝부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아귀가 맞아야 하는 부분마다 신경을 써서 악단과 맞춰가는 모습이 돋보였다.
이 곡은 슈만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이자 아내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작품으로 전체 3악장 중 1악장의 비중이 높다. 특히 도입 부분의 임팩트가 크다. 오케스트라가 ‘E’ 음을 연주하면 협연자는 불안정한 화성과 당김음 리듬의 음형으로 파고들듯이 시작한다. 이내 메인 주제를 노래하는 솔로 파트가 등장하는데, 많은 연주자가 이 솔로 파트를 대부분 격정적이거나 혹은 감상적으로 노래했다.
반면 조성진은 평소 그의 스타일대로 담백하고 서정적으로 연주했다. 슈만이 말한 “음악은 시적이어야 한다”는 취지에 걸맞은 듯했다. 슈만이 말한 시적인 연주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고 감정적으로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카덴차(독주 구간)는 목관 악기와 앙상블을 이루며 반복되는 파트를 거쳐 확장되는 구조인데, 클라이맥스를 시원하게 터뜨리기보다는 파고드는 연주를 이어갔다. 묵직하고 거센 타건보다는 민첩하고 우아한 타건을 구사한 영향인 듯했다. 2악장에서는 보다 내밀한 사운드를, 3악장에서는 깃털처럼 가볍고 민첩한 연주를 선보였다.
2부에서는 정명훈과 도쿄필의 각별한 신뢰가 눈에 띄었다. 정명훈은 2000년부터 도쿄필과 호흡을 맞춰왔고 2016년에는 외국인 최초 명예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일본 최고(最古)의 교향악단인 도쿄필은 우직하고 일관성 있는 악단인 듯했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오래된 우정처럼, 정명훈의 작은 손짓에도 오케스트라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환상 호흡을 자랑했다.
도쿄필하모닉은 4개 음으로 시작되는 베토벤 ‘운명’의 너무나 유명한 동기를 파워풀하게 시작했다. 개성보다는 조화를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특성이 묻은 까닭일까. 전체적인 음악적 완성도는 높았지만 관악 파트가 현악 파트보다 상대적으로 아쉬웠던 점, 악단만의 사운드가 눈에 띄지 않았던 점 등은 한국 악단의 흔한 단점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도쿄필의 연주는 응집성과 일체감이 있었다. 악단은 정명훈과의 신뢰를 토대로 고뇌, 투쟁, 승리로 가는 여정을 선명히 그려냈고 앙코르곡인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초입부터 치고 나오는 금관 악기 팡파르는 운명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듯 공연장을 가득 에워쌌다.
최다은 기자
조성진과 힐러리 한을 집중 분석한 기획 기사는 5월 27일 창간하는 문화예술 전문잡지 ‘아르떼’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