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가 13년 만에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도널드 트럼프·조 바이든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지난해 34년간의 미국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하고 법무법인 태평양과 현대자동차에서 글로벌 리스크에 대응하는 것을 돕는 자문역으로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미국 대선부터 러시아·중동 리스크, 탈(脫)세계화 등 여러 분야의 최근 동향을 살피고 기업에 적합한 조언을 하고 있다.
28일 서울 공평동 법무법인 태평양 본사에서 만난 김 전 대사는 최대 관심사인 미국 대선에 대해 묻자 “모두 나에게 ‘누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것 같냐’고 한다”며 웃었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양쪽 다 당선 가능성은 ‘50 대 50’”이라며 “현재로선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고, 무리하게 예측하기보다는 두 시나리오에 모두 대비해야 할 때”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다시 입성해도 한국 기업이 대미 투자를 멈출 이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며, 선진화한 발전이 이뤄지는 곳이 미국이라며 누가 된다고 해도 미국보다 더 나은 투자처를 찾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 기업 지원 내용이 일부 조정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비지인 미국에서 철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그의 현실적인 판단이다. 오히려 그는 한국 기업이 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에서 미국 기업과 협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34년에 걸친 미국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국 외교관 생활을 보람있게 하면서 충분히 즐겼습니다. 운 좋게도 대사를 세 번(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이나 했고, 6자회담 대표와 대북특별대표를 맡아 한반도 비핵화 상황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죠. 불만이 있어서 그만둔 건 절대 아닙니다. 좀 더 나이 들기 전에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60대 초반이거든요. 아시아에서 좀 더 활동하고 싶었는데 현대차와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좋은 기회를 제안해서 수락했습니다. 13년 전 미국대사로 한국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보통 시민이 돼 오니 진짜 고향에 온 것 같아요.”
▷법무법인 태평양의 글로벌미래전략센터장으로서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세계적으로 전략적·경제적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졌습니다. 기업들이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잘 나아가느냐, 예상하지 못한 도전을 어떻게 예측하고 대응하느냐,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기회를 잡느냐 등 세 분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대외 변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업과 정부에서도 미국 대선을 가장 많이 물어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지에 관심이 많죠. 현재로선 누가 이길지는 ‘50 대 50’인 것 같습니다.”
▷미국 유권자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중요한 이슈는 경제입니다. 외교는 큰 관심사는 아니고, 양쪽 지지자 모두 인플레이션이 좀 완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죠.”
▷트럼프 당선 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보조금 등 지원책을 뒤집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캠페인 중에 IRA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면 실행 단계에서 일부 내용이 조정될 것으로 봐야겠죠. 트럼프는 캠페인 공약을 실행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2017년 처음 당선됐을 때 파리기후협약,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란 핵협상에서 전부 빠져나왔는데 모두 선거 공약이었습니다.”
▷트럼프 당선 시 IRA 보조금이 얼마나 줄어들까요.
“IRA가 법이기 때문에 확 바꿀 수는 없고, 대통령 권한으로 실행 단위에서 조정은 할 수 있겠죠. IRA를 대폭 수정하거나 아예 폐지하려면 의회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데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 투자하는 것은 미국에도 좋은 일이잖아요. 기업을 유치한 주 정부 입장에서도 투자가 후퇴하면 싫겠죠.”
▷IRA가 조정되더라도 국내 기업이 미국에 계속 공장을 짓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배터리, 반도체 등 첨단 공장을 짓기에 미국이 가장 안전하고 매력적인 투자처라고 생각합니다. 법률, 거버넌스 투명성, 인센티브 측면에서 시스템의 장점이 크고 미국 내수 시장도 중요하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혁신, 가장 최고의 창의력, 가장 선진화한 발전이 모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인프라가 있는 미국은 최적의 투자처입니다.”
▷‘세계화’가 도전받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당장 끝나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포퓰리스트’ 리더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업과 각국 정부가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하기도 더 힘들어졌습니다. 당장의 도전적인 상황에 잘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전략을 짜야 할 것 같습니다. 정책 측면에선 협력과 동맹 관계가 한층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의 애로사항이 큽니다.
“그 딜레마는 한국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공통으로 겪는 문제입니다. 미국의 투명성 일관성 공정성에 매력을 느끼는 쪽이 더 많다고 봅니다. 중국과 경제적인 관계에서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한국 기업들도 많이 느꼈을 것이고요. 정부 대 정부 관계 또한 쉽지 않았죠. 모든 나라와 기업이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겁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지식재산권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창의적인 발명과 혁신 풍토는 미국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한국도 투자자, 파트너로서 이런 성장을 같이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투자 없이는 기술이 발전할 수 없잖아요. 미국 빅테크들이 워낙 빨리 치고 나가니까 이들과 파트너십을 맺는 게 중요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중동 불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러시아·우크라이나전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무책임하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 갈등이 확전될 가능성은 어떻게 봅니까.
“걱정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양측 다 갈등을 고조시키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긴장이 좀 더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당선 시 대북정책에 변화가 생길까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2018년 미·북 정상회담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번엔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팬데믹이 끝난 상황에서도 북한이 외교무대에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데 미국 대통령이 바뀐다고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비핵화를 위해 제네바합의, 6자회담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잠깐의 진전이 있었을 뿐 마지막 진전을 못 이뤘죠.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성 김 前 주한 미국대사는
오바마·트럼프·바이든…계속 중용된 亞외교통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외교관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 외교관이 됐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로욜라대 로스쿨(JD)과 런던정치경제대(LLM)에서 법학박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LA)카운티 검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년 만에 검사 생활을 접고 1988년 미국 외교관이 됐다.오바마·트럼프·바이든…계속 중용된 亞외교통
그의 커리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국대사다. 힐 전 대사는 성 김을 국무부 한국과장(2006~2008)으로 발탁했다. 한국과장으로서 성과를 낸 덕분에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었다. 6자회담 수석대표를 거쳐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1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됐다.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활동하던 그는 2017년 주필리핀 미국대사로 임명되면서 한국계 미국인 최초로 주요 동맹국 대사를 두 번이나 지냈다. 필리핀 대사 시절에는 2018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실무 협상을 주도했으며 조 바이든 정부에서는 대북특별대표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을 맡았다.
허란/이상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