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서도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연애편지에 나올법한 이 문구는 미국의 반도체 챔피언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4일(현지 시각) SNS 'X'(옛 트위터)에 올린 글 중 일부다. 겔싱어는 "당신을 공장 개인 투어에 초청하고 싶다"며 "쪽지(DM)를 통해 우리 이야기를 진전시키자"고 적었다.
"보고싶다" 노골적 구애
겔싱어가 구애의 뜻을 나타낸 '당신'은 누굴까. 가족도, 친구도 아닌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다. 테슬라는 인공지능(AI) 가속기 'D1', 자율주행 칩 'HW 4.0' 등 첨단 AI 반도체를 직접 개발해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에 생산을 맡긴다. 최근 파운드리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겔싱어가 삼성전자로부터 테슬라를 빼앗고 싶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B2B(기업 간 거래)'라는 사업 특성 때문에 대외 활동을 꺼렸던 반도체 기업 경영자들이 바뀌고 있다. 활발한 SNS 활용은 기본, 수천 명 넘는 청중 앞에서 식견을 뽐내고 제품을 직접 세일즈하는 경우도 잦다.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를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고, 산업의 특성 또한 고객사 중심 '수주형'으로 바뀌고 있는 영향으로 분석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텔을 이끄는 겔싱어다. 2021년 인텔 CEO로 취임한 겔싱어는 최근 공개 활동 수위를 끌어 올렸다. 공장이 없어 생산을 파운드리기업에 맡기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대상 영업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인텔의 주력 사업인 중앙처리장치(CPU) 분야 오랜 경쟁사인 대형 팹리스 AMD에 대해서도 "리사 수(AMD CEO)를 고객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능수능란한 납품가 깎기 전략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대외 활동이라면 겔싱어 뺨칠 정도다. 한 달에 두세 번씩 콘퍼런스에 연사 또는 패널로 나가서 엔비디아의 AI 사업을 적극적으로 알린다.직접 개최하는 행사에선 보다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평가도 받는다. 지난 18~21일 열린 엔비디아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해 공개적으로 극찬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에선 "HBM을 납품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단가를 깎기 위한 의도된 노림수"란 분석이 나온다.
활동 보폭 넓히는 한국 CEO들
미국 기업 CEO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아시아 CEO들의 변화도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끄는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사장)은 링크드인과 인스타그램 두 개의 계정을 활용하며 수시로 글로벌 산업 트렌드와 경영 철학을 공개한다.최근 열린 주주총회에선 10페이지 넘는 발표 자료를 들고나와 지난해 반도체 경영 실적에 대한 반성과 올해 사업 계획을 주주들 앞에서 상세하게 공개했다. 질의응답에서 마이크를 가장 자주 잡은 사람도 경 사장이었다. 전임 DS부문장인 김기남 고문과는 180도 다른 행보로 평가된다.
삼성 관계자는 "주총 발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장도 경 사장"이라며 "경 사장은 실적 설명회 같은 행사에서도 직접 마이크를 잡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SK하이닉스를 이끄는 곽노정 사장(CEO)도 열려 있는 경영자로 통한다. 지난 1월 'CES 2024'에서 SK하이닉스 CEO 최초로 질의응답 세션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KAIST, 고려대 등을 찾아 학생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밖에 TSMC의 류더인 회장, 웨이저자 CEO도 매 분기 열리는 실적설명회에 나와 애널리스트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다.
'메모리'까지 고객 맞춤형 사업으로 변화 영향
최근 반도체기업 환경은 CEO가 '은둔의 경영자'에서 '1호 영업사원'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가 '전략물자'처럼 변하면서 기업들은 소속 국가를 대표해 경쟁하고 있다. 각국이 내건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따내기 위해 CEO가 직접 뛰어야 하는 상황이 된 영향도 크다.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성격이 수주형으로 바뀐 것도 반도체 CEO들의 대외 활동이 부쩍 잦아진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과거엔 범용 메모리를 생산업체의 스케줄에 맞춰 개발하는 게 대세였지만 최근 트렌드는 1~2년 고객사와 협의를 통해 HBM 같은 맞춤형 D램을 만드는 것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