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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혁신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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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관료와 기업 경영인이 성장과 변화의 동력으로 혁신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요즘엔 정치인도 혁신을 입에 달고 다닌다. 낯설기만 한 혁신공천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지만, 국민에게는 그저 선거 시즌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혁신의 결과는 달콤하지만 혁신이라는 단어의 문어적 의미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것으로 바꾼다는 것이니 살벌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변화, 특히 큰 폭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고 상당한 인내와 고통마저 필요하다는 함축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혁신은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이 실천으로까지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생각을 바꾸는 것도, 새로운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도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이건 실천이건 역사적으로 갑자기 나타나 혁명(revolution)처럼 보이는 혁신도 그 이면에는 장기적인 진화(evolution)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서구 중앙은행의 역사는 300여 년에 이르지만 중앙은행 독립이라는 제도적 혁신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혁신이지만 탄생하기까지 가깝게는 40년, 길게는 300년이 걸린 셈이다. 그 바탕에는 축적된 연구와 논의가 있었고 1980년대 남미의 부채위기와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상황적 계기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튼 올해 세계적으로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50여 개국에서 대선이나 총선이 예정돼 있어 어렵게 이룩한 혁신이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컴퓨터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의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가 얼마 전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 모델인 B100을 발표했을 때 놀라운 성능에 수천 명의 참석자가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전 모델인 H100의 성공이 없었다면 B100의 탄생은 훨씬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산업도 40여 년에 걸쳐 비슷한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눈부신 기술 혁신을 이룩해냈다. 하지만 AI 기술 혁신에선 주요 경쟁국과 후발주자의 거센 도전에 밀리는 형국이다. 우리가 경쟁국에 비해 치열한 진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이런 사례들은 혁신이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며, 진화가 축적되는 과정이 없으면 혁신은 요원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혁신 경쟁에서 이기려면 남보다 빠른 진화의 축적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 압축 성장을 통해 불과 반세기 만에 식민지 국가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로 도약한 것처럼. 시야를 넓혀 경제 전반의 혁신을 생각한다면 경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조정 과정이 적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진화의 핵심이다. 대내외 충격과 구조 변화에 대응한 조정이 시기를 놓칠수록 불균형은 확대되고 경제 혁신을 위한 진화는 어려워진다. 누적된 불균형이 폭발해 경제위기가 발생할 위험은 커진다.

우리 경제의 조정 능력 부족을 물 끓이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해 사회적 관심을 끌어낸 것이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상시적 조정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는 아직도 차고 넘친다.

거의 20년 전부터 의사 부족이 예견됐음에도 이제야 정부가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그사이 더욱 견고해진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가 국민의 건강을 볼모 삼아 저항하면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가계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조정 능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은 상당한 거시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정 과정 없이 1990년 39%에서 2023년 102%로 증가해 금융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1990년 61%에서 2007년 95%로 크게 상승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하락세로 반전했으며, 2023년에는 74%로 안정돼 건강한 조정 능력을 입증했다.

지금의 인류와 원시 인류의 차이를 거대 혁신에 비유한다면 적자생존이라는 진화 과정을 빼놓을 수 없다. 상시적 조정과 점진적 진화 능력을 상실해가는 경제가 전방위적인 글로벌 혁신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혁신적인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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