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러시아 사회에서 남자 노예는 홀로프(холоп), 여자 노예는 라바(раба)라고 불렸다.
12세기에 편찬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에 따르면 이들 노예의 지위는 비참했다.
제대로 된 처우는 꿈도 못꿨다. 노예가 자유민을 구타했을 경우 얻어맞은 자유민은 그 노예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 노예를 살해하더라도 형사상의 벌인 ‘살인 배상금(비라·вира)’이 전혀 없었다. 소유주인 주인에게 ‘재산에 가한 손해’ 때문에 적은 액수의 벌금만 지불했을뿐이다.
반면 상급친위대원(크냐지 무쥐·княжи мужи)을 살해하면 보통보다 두 배나 무거운 살인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처럼 비참한 존재인 노예에서 파생된 단어가 ‘라보타치(работать)’라는 표현이다. 현대 러시아어에서 '일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런데 고대 러시아어에서 ‘라브(раб·교회관계 고문헌에 간혹 등장하는 남성 노예)’와 ‘라바’의 동사형인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현대 러시아어 ‘라보타치(работатъ)’가 의미하는 것처럼 ‘일하다’라는 뜻이 아니었다.
농사일로 대표되는 힘든 노동이란 뜻은 ‘스트라다치(страдатъ)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대신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주인에 대한 노예의 관계’나 ‘고용 관계로 일하는 노예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같은 슬라브어 계열인 체코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20세기 초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는 체코어 ‘라보타(robota)’에서 로봇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체코어에서도 ‘라보타’는 △강제노역 △농노의 노동 △농노가 영주에게 행하던 의무시역 △힘들고 단조로운 일 △고된 일 등을 의미했다고 한다. 힘들고, 위험하고,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길 존재를 희망한 끝에 상상해낸 존재가 로봇이라는 것임을 그 명칭에서부터 분명히 한 것이다.
중세 서유럽에서 ‘일’을 지칭하던 ‘라보르(labor)’보다 슬라브어 계열에서 사용된 ‘라보타치’는 인신적 속박의 정도가 한 단계 더 강한 셈이었다.
물론 서유럽이라고 해서 '일'을 지칭하는 단어가 전하는 '힘듬'의 정도가 덜하지는 않았다.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일은 원죄의 결과인 벌로 생각됐고 자연스레 중세 프랑스 지역에서 ‘라보르’라는 단어는 고통, 노역, 고통스러운 일이란 뜻으로 쓰일 때 널리 활용됐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힘들게 농사일을 해야만 했던 농민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라보르에서 유래한 ‘라보라토레스(laboratores)’였다
참고로 현대 프랑스어에서 노동을 뜻하는 ‘트하바이으(travail)’는 16∼17세기경 프랑스에서 고집 센 동물들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된 세 개(tri)의 말뚝이 있는 기계를 지칭하는 라틴어 ‘트리파리움(tripalium)’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트리파리움은 고문하는 도구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단어 자체가 처음 출발부터 ‘자유의 박탈’과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
최근 챗GPT 개발사 오픈AI와 로봇 스타트업 피규어AI가 협력해 만든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이 공개돼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인간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주변 상황을 파악해 행동에 나서는 모습에 “SF영화 속 로봇이 현실이 됐다”는 반응이 많다.
인간형 로봇의 발전상을 보고 있자면, 로봇이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시기가 빨라질 것이란 기대도 커진다. 동시에 로봇이 그 이름의 근원에 있던 ‘노예’의 속성을 더 짙게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