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있나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그 분야를 꽉 잡고 있는 기업을 꼭 깨부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파괴의 대상이 된 기업은 혁신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텐데, 그러면 혁신에 성공하기 어려워질 뿐이죠. 기존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도 혁신할 수 있습니다.”
기업 경영에서 ‘혁신’의 개념을 처음 정의한 사람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다. 그가 1942년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후 기업인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게 혁신이라고 믿어왔다. 시장을 장악한 경쟁사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무언가를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조를 위해선 파괴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굳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있나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그 분야를 꽉 잡고 있는 기업을 꼭 깨부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파괴의 대상이 된 기업은 혁신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텐데, 그러면 혁신에 성공하기 어려워질 뿐이죠. 기존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도 혁신할 수 있습니다.”
기업 경영에서 ‘혁신’의 개념을 처음 정의한 사람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다. 그가 1942년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후 기업인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게 혁신이라고 믿어왔다. 시장을 장악한 경쟁사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무언가를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조를 위해선 파괴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 학자들이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르네 마보안 교수. 2005년 출간한 <블루오션 전략>으로 “남들과 피 터지게 싸워야 하는 ‘레드오션’은 답이 없다. 경쟁이 없는 ‘블루오션’ 시장을 개척하라”고 설파한 그 사람들이다.
이들이 <비욘드 디스럽션: 파괴적 혁신을 넘어>란 책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던진 메시지는 “기존 기업과 일자리를 파괴하지 않고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비파괴적 창조’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김 교수와 미국에 있는 마보안 교수를 최근 화상으로 만났다.
▷기존 강자를 이기지 않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물론 경쟁은 혁신으로 가는 강력한 길입니다. 수많은 기업과 국가들이 이런 ‘창조적 파괴’를 통해 위상을 높였죠. 한국이 대표적이에요.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모두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을 거쳐 세계적인 기업이 됐습니다.”
▷어떻게 경쟁 없이 혁신에 이를 수 있습니까.“그게 바로 ‘파괴 없는 혁신’입니다. 혁신에 이르는 여러 길 가운데 창조적 파괴에 가려졌던 길이죠. 지금도 많은 경영자는 자신이 승자가 되기 위해 상대를 패자로 만드는 ‘제로섬 게임’식 사고에 갇혀 있습니다. 생각의 틀을 ‘경쟁’에서 ‘창조’로 바꾸면 다른 길이 보입니다. 하나의 파이를 나 혼자 먹기 위해 남들을 제거하는 게 기존의 ‘경쟁 마인드’라면 ‘창조 마인드’는 새로운 파이를 하나 더 굽는 겁니다.”
▷비파괴적 혁신의 구체적 예가 있을까요.“미국의 신용카드 소액결제 시장을 개척한 블록(옛 스퀘어)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신용카드 시장은 비자나 마스터 같은 엄청나게 큰 기업들이 장악한 분야죠. 블록은 이들과의 싸움을 피하면서 새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베이비시터나 아이스크림 노점상처럼 신용카드 단말기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을 겨냥했어요.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었죠. 도심의 자투리 공간을 주차장으로 탈바꿈시켜 ‘도심 주차장’이라는 시장을 연 일본 주차장 운영업체 파크24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한국에도 그런 기업이 있을까요.“김치냉장고 ‘딤채’를 처음 만들어낸 위니아가 있죠. 기존 냉장고 산업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잖아요. 한국의 산후조리원도 비파괴적 창조의 산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비파괴적 혁신의 기회를 찾아야 할까요.“특정 분야에만 그런 기회가 있는 건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레드오션에서도 비파괴적 혁신이 가능하니까요. 해당 분야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 사업화되지 않은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은행업은 가장 심각한 레드오션이에요. 아주 오래된 산업이고, 탄탄한 거대 기업들이 있죠. 그럼에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은 ‘마이크로 파이낸스’라는 새로운 시장 기회를 찾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액 대출은 그 어떤 은행도 사업화하지 않았으니까요.”
▷비파괴적 혁신이 파괴적 혁신보다 나은 점은 무엇입니까.“사회적 고통이 작다는 점이죠. 파괴적 혁신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기업과 일자리를 없앱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사회 구성원들의 고통은 해결해야 할 문제죠. 사람들은 인공지능(AI) 시대가 오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하죠. 파괴적 혁신 위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에도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AI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기존 산업을 파괴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창조에 AI를 활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죠. 중국 원격진료 플랫폼 ‘핑안 굿닥터’가 그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AI가 원격으로 환자를 간략하게 진단하고, 화상으로 의사가 상담해줘요. 이 플랫폼은 기존 의료 인력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형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기존 의료 시스템을 개선했죠.”
▷창업자가 비파괴적 혁신을 추구하면 어떤 점이 좋습니까.“우선 생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기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골리앗 기업’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죠. 골리앗과 싸우는 과정에서 대다수 신생 기업은 파괴되거든요. 지난해 파산한 미국의 원격 치아교정 스타트업 스마일다이렉트클럽(SDC)이 그랬습니다. 2020년까지 승승장구하던 이 기업은 3차원(3D) 프린팅 기술과 원격 진료로 7000달러에 달하던 교정 비용을 1800달러까지 낮췄고, 200만 명의 실제 고객도 확보했어요. 2019년 기업공개에도 성공했고요. 하지만 그 대가로 미국 전역의 치과 의사들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SDC는 막대한 소송과 마케팅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창업자가 굳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 택시업계와 대립한 승차공유 서비스 ‘타다’도 비슷한 사례입니다.“맞습니다. 타다도 거대한 기존 산업에 정면으로 맞선 게 실패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다의 실패 요인으로 한국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꼽히지만, 이건 이 자리에서 논의할 대상이 아닙니다. 수많은 택시 기사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만큼 정부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파괴적 혁신의 길을 택한 것을 타다의 실패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무조건 피해야 합니까.“꼭 그런 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정면 대결해서 이길 수도 있겠죠. 작은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거대 기업을 무너뜨린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싸움이 다윗 입장에서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다는 겁니다. 비파괴적 혁신은 이런 점에서 뚜렷한 이점이 있습니다. 누구도 나의 사업으로 인해 공격당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사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거죠.”
■ 김위찬·르네 마보안 교수, 경영학계 판도 바꾼 '블루오션 신드롬'의 주역들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는 세계 경영학계의 판도를 바꾼 석학으로 꼽힌다. 2005년 출간한 <블루오션 전략>을 통해 경영학계에 ‘블루오션’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책은 세계 100여 개국에 발간돼 40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42만 부 판매됐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최고의 경제경영서’, 같은 해 아마존이 선정한 ‘최고의 경제 경영서 10’에 꼽혔다. 이들은 지난해 새로운 저서 <비욘드 디스럽션: 파괴적 혁신을 넘어>를 발간해 파괴 없이도 창조를 이뤄낼 수 있다는 ‘비파괴적 창조’ 개념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2019년 싱커스50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에 뽑혔다. 이들은 지난해 글로벌 경영 전문지인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4대 선도적인 경영 사상가’에도 뽑혔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