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외과의사인 갓윈 백스터(윌렘 데포)의 실험실. 그의 역작인 벨라(엠마 스톤)는 바로 이곳, 해부용 시신들 사이에서 첫 걸음을 딛었다. 몸은 다 컸지만 영혼은 새 것이다. 기쁨과 호기심, 자신을 즐겁게 하는 욕망을 향해 삐뚤빼뚤 거침없이 걸어간다.
영화 <가여운 것들>은 실험 대상이던 그녀가 인간으로 우뚝서기까지 여정을 그린다. <더 랍스터>(2015), <킬링디어>(2017),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2018)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번에도 자신만의 뒤틀린 세계를 ‘조작’해냈다. 그 결과물은 전작들보다 밝고 환상적이다.
벨라의 탄생엔 비극이 있지만 그녀는 모른다. 대부분의 영화 주인공들이 지난 날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동력으로 삼는 것과 달리, 그녀에겐 그림자가 없다. 편견이나 좌절, 자기혐오를 겪지 않았기에 의지를 꺾지 않는다. 짖궂은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세계 여행으로 유혹할 때 벨라는 덜컥 걸려든다.
둘은 리스본과 알렉산드리아, 파리를 종횡무진한다. 덩컨의 속셈은 순진한 여자를 잠깐 갖고 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벨라는 그에 머물지 않고 온갖 선을 넘나든다. 지켜보던 덩컨이 거꾸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벨라는 발칙하다. 파리에서 뜻밖의 소득원을 발견한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허우적대던 그녀의 걸음이 그럴듯해진 순간, 그녀의 시야도 세상을 향해 트여있다. 벨라는 세상의 희생양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랑이 고통의 원천으로 여겨졌던 <더 랍스터>와 달리, <가여운 것들>이 그려낸 세계는 살짝 낙관적이다. 벨라는 사람들로 인해 타락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세상 또한 부조리하긴 해도 그녀의 앞길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벨라를 끝까지 신뢰하는 이들이 과학자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녀를 만들어낸 굿윈 박사는 고통을 이성적 사고로 견뎌내려고 한다. 온몸이 수술 자국들로 가득하지만, 그 원흉인 아버지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의 진보를 위한 것이므로.
그의 제자인 맥스(라미 유세프) 또한 벨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순수 관찰대상으로 그녀를 처음 접했던 맥스는, 격정에 빠져 추락하는 덩컨과는 다르다. 이처럼 <가여운 것들>에는 끝까지 제 정신을 유지할 줄 아는 우아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파리의 시궁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벨라에게 보여주는 관용은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더 페이버릿> <랍스터> <킬링디어>의 많은 인물들이 어리석음과 나약함으로 무너진 것과 사뭇 다르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벨라는 보여준다.
엠마 스톤(36)의 연기는 비범하다. 곧 열릴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라라랜드>와 <크루엘라> 이후 이번 영화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영국 아카데미를 포함해 여우주연상만 26개를 거머쥐었다. 개인적으로는 추락하는 바람둥이 덩컨을 연기한 마크 러팔로를 백미로 꼽고 싶다. 영화의 블랙 코미디적인 순간을 노련하게 이끌어낸다.
<가여운 것들>이 밝고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감독의 전작들처럼 불편하고 기괴한 이미지들이 빠지지 않는다. 불편한 선율의 음악이 수시로 끼어들고, 터무니없는 설정 또한 존재한다. 개연성과 핍진성을 중시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설정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아름답지만 인공적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는 호불호가 갈린다. 평단의 반응은 좋아서,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0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외에도 총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각색, 촬영, 미술 부문 등이다. 13개 부문에 오른 <오펜하이머> 다음으로 많다. 김유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