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튀르키예 이스탄불)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0년 동안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42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지은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덕분이었다. 5세기 중반 훈족은 이 성벽에 막혀 말머리를 돌렸고, 사라센은 무려 5년(674~678년) 동안 이 성을 포위했지만 끝내 뚫지 못했다. 이후에 침공한 러시아도, 아랍도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의 힘은 두 군데서 나왔다. 하나는 3개의 성벽을 차례차례 쌓아놓은 3중 구조란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넓고(18m), 깊은(6m) ‘해자’(垓子: 성벽 바깥을 빙 둘러싼 물웅덩이)였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던 침략군들은 눈앞에 맞닥뜨린 거대한 물웅덩이에 진격을 멈췄다.
그 옛날 서양 전쟁사를 꺼낸 건 얼마 전 만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A씨가 꺼낸 ‘해자’란 단어가 귀에 맴돌아서다. 최근 CEO로 선임된 그는 임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회사의 해자는 무엇이냐”, “경쟁 업체는 어떤 해자를 갖췄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남들이 파놓은 물웅덩이를 깨부수고, 남들이 못 건너올 물웅덩이를 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A씨는 “똑 부러진 답도 못 들었고, 나도 못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가장 절박한 숙제가 바로 우리만의 해자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만의 해자를 찾는 것, 그리고 남들이 파놓은 해자를 뚫는 것은 비단 이 회사만의 일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놓인 상황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어서다.
국가대표 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부터 그렇다. 지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인공은 삼성이 아니라 인공지능(AI)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미국 엔비디아와 각 기업이 원하는 맞춤형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들어주는 대만 TSMC다. 인텔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분야에서 ‘타도 삼성’을 외치고 있다. 삼성은 스마트폰 매출에 이어 출하량에서도 애플에 왕좌를 내줬고, 세계 TV 시장(출하량 기준) 챔피언 자리를 놓고 삼성과 다투던 LG는 이제 중국의 하이센스와 TCL에 이어 4위로 떨어졌다. 삼성과 LG가 양분한 디스플레이와 HD현대·삼성·한화가 휩쓸던 조선은 이제 중국 기업 세상이 됐다.
미래 산업도 마찬가지다. 각 분야 최강자가 모두 뛰어든 ‘AI 전쟁’은 구글 아마존 오픈AI 등 미국 기업 간 싸움이 됐고, 자동차 분야의 ‘게임 체인저’가 될 전기차와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은 CATL, 비야디(BYD) 등 중국 손에 넘어갔다. 또 다른 유망 산업인 바이오 신약은 화이자, 머크(MSD) 등 미국 기업과 로슈, 노바티스 등 유럽 기업 판이다.
한국 기업의 해자는 점점 좁아지고 얕아지는데 해외 기업의 해자는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이 직면한 위기의 핵심 아닐까. 다른 해법이 있을 리 없다. 맨땅에서 시작해 남들의 해자를 하나씩 깨부수고, 우리만의 해자를 구축하던 그때 그 시절의 역동성을 되찾는 것밖에.
그러려면 우리 기업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을 지닌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창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안정보다는 도전이 현명한 선택이란 게 증명되는 순간, 똑똑한 인재들이 의대가 아닌 공대로 가고, 공무원이 아닌 기업을 택한다. 해외 기업들이 구축한 깊은 해자를 박살 낼 ‘신무기’는 그래야 나온다. ‘신(神)이 아니고선 그 누구도 깰 수 없다’던 콘스탄티노플 성을 오스만튀르크가 당대의 신무기 ‘대포’로 무너뜨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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