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엔 창업·선대회장 때부터 내려온 ‘보석’ 같은 사업들이 있다. 각각 30년과 11년간 ‘세계 챔피언’ 자리를 지켜온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이다. ‘초격차’란 딱지가 붙은 이들 품목은 경쟁사엔 두려움을, 직원에겐 자부심을 주는 삼성의 쌍두마차였다.
이랬던 삼성의 ‘원투펀치’에 이상 조짐이 나타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제품 개발에서부터 마케팅·판매에 이르기까지 라이벌 기업들과의 전쟁에서 판판이 밀리기 시작한 것. 급기야 작년에는 한 수 아래로 봤던 SK하이닉스에 ‘인공지능(AI) 시대 메모리 반도체의 승부처’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왕좌를 내줬고 스마트폰에선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출하량 세계 1위’ 자리까지 애플에 양보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얽힌 ‘잃어버린 10년’의 결과물은 삼성에 새로운 숙제를 안겨줬다.
○첨단 D램 경쟁에서 우위 잃은 삼성
“삼성에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 최근 만난 메모리 반도체 권위자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재료공학부)는 요즘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을 이렇게 평가했다. 황 교수는 “삼성전자가 벌이는 수많은 사업 중에서 가장 잘하는 게 D램인데 압도적이었던 경쟁력이 확 떨어진 모양새”라며 “삼성이 방황하는 사이 경쟁사들은 치고 올라오고 있다”고 진단했다.반도체 사업 경쟁력은 △기술력 △양산 능력 △투자 규모 등으로 결정된다. 이 중 기술력과 관련해선 2~3년 전부터 끊임없이 경고가 나왔다. 10나노미터(㎚) 3세대 D램(1z ㎚ D램) 첫 공개를 3위인 미국 마이크론에 내주는가 하면 10㎚ 5세대 D램(1b ㎚ D램) 개발 경쟁에선 2위인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작년부터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챗GPT 등 생성형 AI 서비스에 꼭 필요한 HBM 시장에서 2등 업체가 된 것이다. HBM 최대 고객인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 제품만 받은 데 따른 것이다. 더블데이터레이트5(DDR5) 등 일반 D램 상황도 비슷하다. 서울 용산전자상가 등 실물 시장에선 “20% 비싸도 SK하이닉스 제품이 낫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인력도 빠져나가고 있다. HBM이 대표적이다. 2018~2019년 삼성전자가 HBM 사업부의 힘을 뺀 결과 관련 인력이 경쟁사로 대거 이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D램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2022년 4분기 17.6%에 달하던 SK하이닉스와의 격차는 지난해 3분기 4.6%포인트로 좁혀졌다.
○프리미엄 폰 시장에서 약세
또 다른 축인 스마트폰에선 애플이란 ‘넘사벽’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한때 삼성-애플 양강 체제였던 600달러 이상 ‘프리미엄’ 시장은 이제 애플만의 ‘나홀로 시장’이 됐다. 지난해 애플의 매출 점유율이 71%에 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삼성전자 점유율은 17% 수준에 그친다. 아이폰에 ‘고급 제품’ 이미지를 내준 영향이 크다.삼성전자는 신흥국에서 중저가 시장을 주도하며 출하량 기준 점유율 1위를 2012년부터 11년 동안 지켰다. 지난해엔 애플에 출하량 기준으로도 왕관을 내줬다. 삼성전자의 뿌리 사업인 가전에선 ‘비스포크’ 이후에 뚜렷한 간판 제품이 없는 게 아쉬움으로 지적된다.
산업계에선 해법은 ‘기술경영’뿐이라고 진단한다. 이 회장이 자유로운 몸이 된 만큼 긴 호흡으로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제품 개발에 나서 경쟁사와의 ‘초격차’를 다시 일궈내야 한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단기 성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이 회장은 긴 안목으로 ‘기술 경영’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이 회장이 이미 ‘세상에 없던 기술’을 화두로 던진 만큼 삼성전자가 기술 초격차 확보에 올인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