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모어(2년차) 증후군.’ 화려한 루키 시절을 보낸 선수들이 2년차에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치는 현상을 말한다. 신인 때는 주위의 기대치가 낮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마음껏 기량을 펼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 2년차에 오히려 부담감에 발목이 잡히면서 나타난 결과다.
안나린(28)의 2023년이 그랬다. 202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에 수석으로 합격하며 화려하게 진출한 미국 무대, 2년차였던 지난해 안나린은 24개 대회에 출전해 톱10은 단 한 번에 그쳤다. 8개 대회에서 커트 탈락하며 투어의 쓴맛을 봤다.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안나린은 “한국과 확연히 다른 환경에 연착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미국 무대에서 쓴맛을 많이 봤다”며 빙그레 웃었다.
“새로운 비상 준비 중”
이제 미국 무대에서의 세 번째 도전, 안나린은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미국 환경에도 익숙해졌고, 투어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할지도 조금 알 것 같다”며 “3년차인 올해 진짜 제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스윙 교정과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안나린은 ‘대기만성형’ 선수다.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해 골프를 시작하는 일반 선수보다 훨씬 늦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클럽을 처음 잡았다. 취미로만 배우던 골프는 중학교 1학년, 항공사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제주로 내려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시작이 늦은 탓에 엘리트 코스로 불리는 국가대표나 상비군에 발탁되지 못했고 주니어 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차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기다린 안나린은 KLPGA투어 데뷔 3년6개월 만인 2020년 10월 오택케리어 챔피언십에서 ‘93전 92기’로 첫 승을 거뒀다. 이어 4주 만에 메이저 대회인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단숨에 KLPGA투어 강자로 떠올랐다. 이듬해 LPGA투어 진출을 선언한 그는 Q시리즈 수석으로 풀시드를 따냈다. 2018년 이정은 이후 3년 만에 나온 한국 선수의 수석 합격이었다. 루키 시즌의 성적도 준수했다. 우승은 없었지만 여러 차례 우승 경쟁에 나섰고 다섯 번의 톱10을 기록했다.
문제는 2년차에 찾아왔다. 시작은 좋았다. 시즌 세 번째 대회였던 LPGA 드라이브온 챔피언십에서 우승 경쟁 끝에 단독 4위에 올랐다. 그런데 시즌이 흐를수록 샷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샷 미스가 양쪽으로 가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제 샷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스스로 위축되고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진출 후회한 적 없어”
지난 시즌, 달콤함보다 씁쓸한 순간이 더 많았지만 “미국 무대에 진출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일하는 직업을 갖고 싶었던 저에게 LPGA투어는 ‘꿈의 직장’”이라며 웃었다.답답했던 지난해, 안나린은 양희영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희영 언니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성실한 선수”라며 “시즌 최종전인 CME투어챔피언십 우승컵을 든 언니를 보며 ‘나도 꾸준하게 노력하면 뭐라도 이뤄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양희영만큼이나 안나린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연습벌레다. 안나린의 강점은 정확한 퍼팅이다. 그는 “퍼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감(感)”이라며 “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연습이다. 퍼팅이 흔들린다 싶을 때는 감이 올 때까지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연습한다”고 강조했다.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안나린이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뜨겁게 경쟁을 즐기는 골퍼가 있다. 그는 “제가 의도한 샷이 나오고 상대방과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할 때 가장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낀다”며 “지난해에는 이런 기분을 느낀 순간이 거의 없었다. 올해는 많은 대회에서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에 올 시즌 가장 큰 목표 역시 우승이다. 그는 “올해는 꼭 제가 가장 사랑하는 클럽 퍼터로 홀에 공을 집어넣는 챔피언 퍼트의 순간을 여러 번 만들어내겠다”고 힘줘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