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어 '숨은 로또'로 불렸던 보류지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집값이 보류지 가격보다 낮아진데다 투자심리도 식어버린 탓이다. 강남은 물론이고 서울 주요지역에서도 보류지들이 주인을 못찾고 있다. 보류지 매각이 늦어지면 조합의 자금부담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보니 조합도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31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신길3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은 이날부터 신길동 '더샵 파크프레스티지' 보류지 입찰을 받는다. 보류지는 재개발·재건축 조합이 소송 등에 대비하기 위해 분양하지 않고 남겨둔 물량이다. 전체 가구의 1% 이내에서 보류지를 정한다.
이 사업장 보류지는 전용 59㎡ 1가구(13층)와 전용 84㎡ 1가구(19층)다. 지난해 1월부터 3차례 공고를 냈지만 1년째 주인을 찾지 못했다. 공고가 반복되며 가격도 하락했다. 두 가구 최저 입찰가 모두 2억5000만원 내려왔다. 이달 4차 매각 공고에서 전용 59㎡ 최저 입찰가는 10억5000만원으로 첫 공고 13억원보다 19.23% 낮아졌고 전용 84㎡ 1가구 역시 16억원에서 13억5000만원으로 15.6% 깎였다.
몸값 2억5000만원 내렸어도…"시세보다 1억원 비싸"
가격을 내렸음에도 매각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신길동 개업공인중개사는 "전용 84㎡는 급매물이 보류지보다 1억원 이상 저렴하고 전용 59㎡도 싸다고 보기 어렵다"며 "가뜩이나 매수자가 없는 상황이라 잘 팔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서초구 신반포13차아파트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도 잠원동 '신반포 르엘' 보류지 2가구 입찰을 받고 있다. 이 아파트도 지난해 11월 보류지 매각에 나섰지만, 모두 유찰됐기 때문이다. 매각 대상 보류지는 전용 107㎡(8층)와 전용 118㎡(2층) 1가구씩이며, 최저 입찰가는 각각 35억원과 36억원이다.
처음 보류지 매각을 공고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시세보다 저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점차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잠원동 개업중개사는 "지난해만 하더라도 시세나 호가보다 2억원가량 저렴했다"며 "나쁘지 않은 가격에도 투자심리가 위축된 탓에 유찰됐는데, 이제는 시세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신반포 르엘에 전용 107㎡ 매물은 없지만, 바로 옆 단지인 '래미안신반포리오센트' 전용 108㎡ 매물은 35억원부터 나왔다. 최저 입찰가와 같은 액수다. 신반포 르엘 전용 118㎡ 매물 호가는 37억5000만원부터 시작한다. 보류지가 5000만원 저렴하지만, 가격 대비 큰 차이라고 보긴 어려운 수준이다. 보류지는 이미 공사가 완료됐기에 옵션이나 동·호수를 바꿀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호황엔 '로또' 인기…불황엔 '애물단지' 전락
보류지는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알짜 매물로 여겨진다. 최저 입찰가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경우도 많다.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는 지난해 6월 전용 59㎡ 보류지가 최저 입찰가보다 1억2000만원 비싸게 팔렸다. 비슷한 시기 '개포자이프레지던스' 전용 185㎡(73평) 펜트하우스도 최저입찰가 40억원보다 30억원 비싼 70억원에 팔린 바 있다.다만 불황기에는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시세가 빠르게 주저앉으며 보류지가 상대적으로 비싸지고,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며 매수자를 찾기도 어려워지는 탓이다. 문제는 보류지 매각이 늦어지면, 이에 따른 부담은 조합이 고스란히 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보류지 매각대금은 관리처분계획의 수입금에 포함된다. 때문에 정산이 완료돼야 한다. 매각이 지연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조합 해산도 늦어질 수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서울 아파트 가격은 0.11% 하락했다.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도 지난 22일 기준 83.1을 기록했다. 매매수급지수는 수요와 공급 비중(0~200)을 지수화한 수치다. 100을 기준으로 0에 가까울수록 집을 팔려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이 적다는 의미다.
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수석위원은 "부동산 시장이 침체돼 수요자가 제한적인 상황"이라며 "보류지도 가격이 시세에 비해 확실한 매력이 있어야 눈길을 끌 수 있다"고 말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