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는 아쉽고, 현종은 끔찍합니다. 강감찬은 전술가인데, 여기서 나오는 갈등은 말이 안 됩니다."KBS 2TV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동명 원작 소설을 집필한 길승수 작가가 한경닷컴과 인터뷰에서 '역사왜곡' 수준의 묘사가 드라마에서 등장한다면서 한탄했다.
'역사적인 고증을 반영한 전통의 사극', '공영방송의 가치를 보여주는 드라마'. KBS 대하드라마에 대한 평가다. 환생하고, 악마로 변하고, 밤이면 담을 넘는 수절 과부와 세자를 매혹하는 세작까지 동시간대에 타 방송사에서 다채로운 소재를 내세운 사극이 여럿 방영됐지만, '고려거란전쟁'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으며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에 침공에 맞선 고려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고려의 세종으로 불리는 현종,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명장 양규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방송부터 휘몰아치는 전개와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 등이 화제를 모으면서 두 자릿수 시청률을 돌파했고, 강감찬 장군 역의 최수종은 지난해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고려거란전쟁'은 작가 교체 의혹이 불거질 만큼 시청자들 사이에서 "내용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여기에 길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역사적인 사실에서 벗어난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지적하고 나서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길 작가는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이자 자문위원으로 2022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길 작가는 "촬영 전 몇 회의 대본을 받아 본 게 전부"라며 "당시 사료와 다른 부분, 수정해야 할 내용 등을 정리해서 전달했는데 그 후에 연락이 없었고, 그 후 드라마로 나온 걸 보니 수정 없이 그냥 등장하더라"고 전했다. 전쟁 장면을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공동 연출자 김한솔 PD와는 관련 대화를 계속 주고받았지만, "등장 인물과 사건 등과 관련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문한 부분도 없고, 원작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게 가고 있다"는 게 길 작가의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이게 '대하' 사극이 아닌, '성균관 스캔들'과 같은 퓨전 사극이었다면 마음대로 각색해도 된다. 원작과 달라도 된다"며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은 그게 아니지 않나. 대하 사극인데 역사적 사실과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려거란전쟁'을 둘러싼 논란은 양규 장군의 전사 이후 불거졌다. 공교롭게도 길 작가의 원작 소설에 나온 부분까지다. 길 작가는 "현재 이후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며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그때까지 썼던 원고를 제작진에게 전달했고, 앞으로 쓰는대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작가가 '필요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길 작가는 "시청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건 17회부터인데, 16회까지 제가 쓴 원작을 최대한 비껴가려 했지만 이를 기반으로 쓴 것"이라며 "이후에 나오는 내용들, 가령 현종이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 갈등이 심각하다는 내용 등은 사실과 심각하게 다르다. 시청자들은 '고려호족전쟁'이라고 할 정도인데, 실제 고려의 지방 제도는 서희, 성종이 거의 다 정비를 했고, 현종은 이를 보완하는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금쪽이'라고 불릴 정도로 허술하고 철없게 묘사되는 '고려거란전쟁' 속 현종의 모습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 길 작가는 "참혹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종은 거란의 거듭된 침략과 국난을 극복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덕을 갖춘 군주'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길 작가는 이런 상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자문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길 작가는 "원작 계약 후 제작진, 작가와 만나 역사 강의를 5회 정도 해줬다"며 "KBS아트비전에 가서 갑옷도 함께 보고, 미술 자문도 했는데, 작가님이 교체됐다. 이후 새로 온 작가님은 제 강의를 30분 정도 듣더니 '필요없다'고 했고, 저도 자문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저도 '고려거란전쟁'을 15년째 쓰고 있는데, 그 이유가 고증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라며 "어려운 내용이니 자문받아야 하는데, 나에게 받기 싫다면 다른 전문가에게 받으라고 소개해줬는데 그 분에게도 받지 않은 거 같다. 그 이후 자문이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른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길 작가가 올해 출간될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 이런 논란을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지만, 길 작가는 "제가 먼저 뭐라고 한 게 아니라, '고려거란전쟁' 애청자들이 17회 방송이 나간 이후부터 갑자기 제 블로그에 들어와 '너무 심하다'고 하소연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그분들의 글을 보고, 저도 우려를 한 것이다. 드라마를 잘못 만들어서 유입된 거지, 억지로 그런 게 아니다"고 반박했다.
논란이 확산되면서 몇몇 온라인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트럭시위까지 언급되고 있다. 트럭시위 기획자는 "창작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면서도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멀쩡히 있는 원작은 커녕 사실 그대로만 그려도 되는 역사적 내용을 다 무시하고, 오로지 작가의 아집으로 드라마가 완전히 망가져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트럭시위를 한다고 해서 당장 드라마가 나아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음 대하드라마를 생각해서라도 충격을 한번 줘야 다시는 이따위 안일함으로 제작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길 작가는 앞으로 방영분에 대한 우려와 조언을 보냈다. "이미 촬영도 많이 됐을 테고, 되돌리기엔 많이 늦은 거 같지만, 고려 대신들의 희생정신 등이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며 "많은 사람이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바로 귀주대첩이 일어난 것으로 알지만, 사실 이는 6차 침공이다. 그사이 고려는 또 큰 고생을 하는데,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면 현종이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고 전했다.
한편 '고려거란전쟁' 측은 "1회부터 현재 방영분까지 작가가 바뀐 적은 없다"면서 작가교체설을 일축했다. 또한 "소설과 드라마는 다른 거 아니겠냐"며 "드라마적인 다채로움을 보여준 것"이라고 전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