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12월만 되면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하는 노래가 있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다. 성탄절 연휴가 끝난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는 이 노래 차지다.
머라이어 캐리의 명곡에는 숨은 비밀이 있다. 과거에 유행한 캐럴의 작곡법을 모조리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애덤 라구세아 머서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머라이어 캐리는 이 곡에 13개 이상 서로 다른 화음 코드를 활용했다. 이 곡의 코드 진행이 1940년대를 주름 잡은 작곡가 어빙 벌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본떴다는 주장이다. 벌린은 이 곡에서 어린이들이 눈썰매를 타는 풍경을 멜로디로 표현했다. 장조 화음과 단조 화음을 연이어 붙여 추운 겨울과 명랑한 화음을 대조한 방식이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 중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라는 가사에서 이런 진행 방식이 들린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 도입부는 작곡가 빌 스펙터의 ‘크리스마스 기프트 포 유’처럼 들린다. 트롬본, 차임벨 등 다채로운 악기를 빠른 박자에 맞춰 연주하는 식이다. 재즈 빅밴드가 공연 시작을 알릴 때 화음을 끊어치는 주법과 비슷하다. 코드와 연주 방식 모두 재즈와 연관성이 깊은 셈이다. 라구세아 교수는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를 들을 때마다 재즈 애호가들이 냇 킹 콜을 떠올리는 이유 중 하나”라며 “머라이어 캐리는 과거에 전무하던 음악을 내놓은 게 아니다. 20세기 초 미국 대중음악을 창시한 재즈 리듬과 코드를 담아 명곡을 써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머라이어 캐리는 왜 재즈를 캐럴과 엮었을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의 크리스마스 도입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남북전쟁 때까지 미국 사회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았다. 청교도가 크리스마스의 세속화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건 전쟁 이후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뒤 대통령에 취임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1870년 크리스마스를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다. 분열된 여론을 통합하기 위한 조치였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전쟁 후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풀어내려는 시도였다.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려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크리스마스를 도입했고, 공휴일로 지정된 뒤 4년이 지난 1874년 메이시스백화점이 처음으로 백화점 외부와 진열대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본격적으로 ‘세속화’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미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카드가 발매됐다. 1931년 코카콜라가 산타클로스 캐릭터를 활용한 광고를 내면서 크리스마스는 대중화됐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만들어지는 데 60년이나 걸렸다는 얘기다.
캐럴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진화했다. 1920년 전까지 주로 성가곡이 성탄절 기념곡으로 쓰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나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등을 연주했다. 1920년대부터 축음기와 라디오가 상용화하면서 대중음악(팝)이 탄생했다. 이때 미국 대중음악계를 장악하던 장르가 재즈였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프랭크 시내트라의 캐럴이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하며 ‘재즈풍 캐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재즈에 기반한 캐럴은 1960년대 들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로큰롤이 부상하면서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비틀스 등 록가수가 빌보드를 장악했고, 록밴드 연주에 맞춰 화음이 단순해졌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과 스티비 원더 등 솔, R&B 등 흑인 음악이 다시 주류를 장악하기 전까지 백인들의 로큰롤이 미국 대중음악을 좌우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1994년 발매 직후 큰 인기를 끈 배경에 인구 변화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99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주요 소비층이 된 베이비붐 세대가 ‘재즈풍 캐럴’에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는 것이다. 라구세아 교수는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에 쓴 리듬, 연주 방식, 악기 등은 솔과 R&B, 재즈에서 비롯됐다”며 “우리가 이 곡을 들으면 20세기에 대한 향수를 짙게 느끼는 이유”라고 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