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희끗한 대표만 6명, 스타트업에 ‘엔젤’이 되고 싶다고 했다. LG그룹에서 2019년 나란히 은퇴한 전임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성공 신화를 쓴 베테랑이 뭉쳤다. 여섯 명의 뜻을 모아 이름도 엔젤식스플러스로 지었다.
엔젤식스플러스는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 유진녕 전 LG화학 사장, 이우종 전 LG전자 사장, 박종석 전 LG이노텍 사장, 신문범 전 LG스포츠 사장, 김종립 전 지투알 사장 등이 이끈다. LG전자 상무 출신인 김재룡 부사장은 최고운영책임자(COO) 역할을 맡고 있다.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직접 지분투자를 하거나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를 연결해준다. 또 재무나 조직 운영, 법률, 해외 진출 같은 경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한다. 회사가 지닌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영업 및 판로 개척을 도와주고, 신사업을 공동 개발하기도 한다.
이들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성공 DNA’를 후배 기업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차고에서 시작한 빅테크 창업자들처럼, 서울 양재동 주차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원 포인트’ 조언이라도 들으러 엔젤식스플러스를 거쳐간 회사만 벌써 100곳이 넘는다. 계약서를 쓰고 하는 정식 컨설팅은 유료지만, 이런 1 대 1 코칭은 무료로 이뤄진다. 지난 22일 이들과 만나 새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발전 방향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사회(조일훈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회사를 설립한 지 5년째입니다. 그간 어떤 성과가 있었습니까.▷이우종 대표=창업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져서 한동안 거의 활동을 못했지만, 최근 활동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김재룡 부사장=최근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와 손잡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딥테크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고 있습니다. KAIST 출신 동문들이 세운 액셀러레이터(AC)인 KOC파트너스와 함께 투자를 검토하기도 하고, 스타트업을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스타트업을 모아 분기별로 교류회도 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로 시너지를 낼 만한 회사들끼리 협업 가능성도 논의하곤 합니다.
▷김종립 대표=‘배달의민족’을 보며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플랫폼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김봉진 창업자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술이라도 갖고 있지만, 플랫폼은 개발자도 필요하고 네트워크도 필요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스타트업 대표들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요구하는 것도 투자뿐 아니라 큰 기업과의 네트워킹입니다.
▷사회=한국에 ‘진짜’ 혁신은 아직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 수준을 어떻게 평가합니까.▷박진수 대표=낮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스타트업이 열이면 열 다 성공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실패하지 않겠다 싶은 회사가 분명히 있습니다. 보통 자금이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돈보다 중요한 열정과 끈기, 네트워크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혁신은 이것들의 결과물입니다.
▷박종석 대표=스타트업은 결국 ‘씨 뿌리기’와 같습니다. 많은 창업이 이뤄져야 그중 성공하는 일부가 더 많이 나오는 거고요. 씨앗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사회=플랫폼 기업이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원천 기술을 갖춘 스타트업만 살아남고 있습니다. 성장통으로 봐야 할까요.
▷유진녕 대표=솔직히 창업 생태계가 아직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대기업이 이걸 사주는 구조가 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적 시각도 ‘대기업이 뺏는다’는 식으로 형성돼 있죠. 그러다 보니 엑시트가 안 됩니다. 좋은 창업자가 순환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생태계가 잘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회=그만큼 스타트업의 수준이 올라오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예를 들면 지난해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된 자율주행 스타트업 포티투닷 같은 경쟁력 있는 회사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이 대표=포티투닷과 현대차의 방향성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봐요. 대기업 조직에선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죠. ‘트랜스포메이션(변화)’을 외부에서 하기로 한 겁니다. 사실 이 변화는 스타트업에도 매우 중요한데요. 여전히 변화의 주체가 돼야 할 중소기업이 기존 패러다임에 젖어서 혁신에 두려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김 부사장=한국의 문화를 보면 스타트업이 인수합병(M&A)보다 그냥 영원한 공급 업체로 살아남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이 엑시트를 하고 다시 한번 창업에 뛰어든다기보다 적당히 배부른 상태로 공급 업체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사실 미국만 보더라도 M&A를 ‘당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매각해 돈을 벌고 또 창업하는 식으로요.
▷사회=인공지능(AI), 로봇 분야에서 국내 스타트업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신문범 대표=제조산업의 본질은 결국 규모의 경제거든요. 한국에서 생산했을 때와 해외에서 생산했을 때 비용 차이가 큽니다. 한국의 경쟁 상대, 즉 ‘진검승부’를 벌일 나라는 이제 중국인데요. 저는 손잡을 나라로 인도를 추천합니다. 인도공과대(IIT)에 떨어진 학생들이 매사추세츠공대(MIT)를 갈 정도입니다. 제가 인도에 있을 때 신기한 걸 봤는데요. 엄청나게 큰 대기업이 CEO를 공개 모집하더라고요. CEO 하루 일과를 방영해주는 TV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이 나라 ‘되겠다’ 싶더라고요. 인도와 적극적인 민간 외교를 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 대표=로봇이든 배터리든 소부장이든 제조 기반 스타트업이 많이 생기려면 거기 들어갈 시드머니를 지금보다 크게 늘려야 합니다. 로봇 액추에이터 하나 만드는 데 몇십억, 몇백억원이 투입됩니다. 정부와 대기업이 협조해서 스타트업의 ‘스타팅 포인트’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어요.
▷유 대표=이스라엘이 스타트업의 메카잖습니까.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그토록 실용적인 아이디어들이 샘솟았을까요. 답은 ‘언메트 니즈’(미충족 수요)를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도 소부장이 됐건 AI가 됐건 산업의 언메트 니즈를 잠재력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노출시킬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은 그렇지 못하죠.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고 5년, 10년 뒤에는 어떨지 교수들이나 연구기관이 잘 몰라요. 배터리산업 5년 후 개발 목표를 발표하는데 이미 다 개발된 기술을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 특정 산업군에서 가장 앞서 있는 기업들이 프로젝트를 주도해야 성과가 날 겁니다.
▷신 대표=언메트 니즈를 찾기 위한 과정이 존재하잖아요. 제품을 소비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철저히 조사해 다가올 미래가 어떨지를 예측할 수 있는 역량이 조직 내에 필요한 건데요. 한국은 항상 너무 조급해요. ‘시간이 없다’ ‘빨리 해라’라고 하니까 주먹구구식이 많고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죠. 그러다 보니 매몰비용은 산더미처럼 쌓이고요.
정리=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