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勞動), 사전에선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름처럼 '막'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장이든 건설 기초안전교육을 이수해야만 일할 수 있다. 대기업 건설 현장은 규칙을 준수하기만 하면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벌이도 상당하다.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취업난과 불경기가 겹치면서 최근 들어 2030세대들이 문을 두드린 영향이다. 그들의 눈은 패배감 대신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의욕으로 빛난다고 한다. 아들뻘 팀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인생 2막을 쓰고 있는 나재필(56) 씨의 이야기다.
Q. 자기소개부터 해주세요.
"평범한 베이비부머 나재필(56)입니다. 기자로 27년간 일했습니다. 남들보다 직급이 빨리 올라갔어요. 그만큼 회사의 요구에 충실하게 일했다는 뜻이겠죠. 잘리지 않기 위해 광고와 기사를 맞바꾸기도 했었어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50대 초반에 스스로 회사를 나왔죠. 막연하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준비가 전혀 안 된 애송이를 위한 자리가 없더군요. 그렇게 일용직근로를 시작했고, 1년간 겪은 일들을 담아 <나의 막노동 일지>를 쓰게 됐습니다."
Q. 처음부터 막노동에 뛰어드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남들처럼 등산이나 다닐까 생각도 했었죠. (웃음) 하릴없이 빈둥거리기엔 아직 젊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리에 관심이 있어 한식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했지만 연거푸 떨어졌어요. 요리를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엔 엄청난 괴리가 있더군요. 그러다 대기업 업체 주방보조로 근무했죠. 하루 3000인분의 설거지를 하느라 곡소리가 나더라고요. 고무장갑이 사흘을 못 버텼습니다. 7~9월 한여름 폭염 속에 세척 증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숨이 턱턱 막히더군요. 하루 11시간을 일해 월 240만원을 받았습니다. 3개월이 지나니 관절염 같은 5개 지병을 훈장처럼 얻었죠. 칼보다 펜이 무섭다지만, 그곳에선 펜보다 칼이 더 무서웠습니다. 이후 삽을 들게 됐죠."
Q. 진입 장벽이 있었나요.
"사실 나름 화이트칼라로 지냈으니 고상한 일자리도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찾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대기업 공장 증설 현장을 소개받았습니다. 백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죠. 일용직근로라도 아무나 '막'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현장이든 건설기초안전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등 체계가 갖춰져 있죠. 그렇게 2022년 12월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현장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Q. 현장일은 어떠셨나요.
"첫 일주일이 정말 고비였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온몸에 근육통을 견뎌야 하죠. 일곱번을 버티니 적응이 되더군요. 물론 쉬는 날엔 병·의원을 찾아 고장 난 부분을 점검해야 합니다. (웃음)"
Q. 일과를 소개해주세요.
"일용직근로는 '대기업 건설 현장'과 '일반현장' 두 종류가 있습니다. 대기업 현장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합니다. 월급 떼일 일도 없고, 안전 문제도 신경을 많이 씁니다. 흔히 말하는 '막일'은 일반현장을 말합니다.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가 일이 배정되면 좋고, 날씨가 나쁘면 공치기도 하죠. 날씨에 민감합니다. 건설근로자의 사계절은 사뭇 다릅니다. 봄은 늦게 오고, 겨울은 빨리 옵니다. 일하기 좋은 계절이란 없습니다. 점심은 1~2시간 주어지는데 일부 근로자들은 그 돈마저 아끼기 위해 잠을 자며 꿈을 꿉니다. 어쩌면 배고픔보다 절실한 것은 이루지 못한 꿈일지도 모릅니다."
Q. 2030세대들이 많았다고요.
"팀원의 대부분은 아들뻘이었습니다. 적게는 2년, 많게는 10년 더 짬밥을 먹었으니 대선배죠. '형'이라고 부르는 그들과 허물없이 지내려면 말을 놓아야 하는데, 저는 그들에게 반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침마다 그들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곤 합니다. 그들은 열혈 청년들이예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수성가하려는 이들이었죠. 종잣돈을 마련해 작은 가게를 차린 젊은이도 있었죠. 연애할 시간 없이 묵묵히 일하는 그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Q.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밥과 잠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원초적인 문제죠. 일용직근로자의 힘은 밥심입니다. 살기 위해 먹는 밥, 밥벌이의 무거움이죠. 식사는 보통 '함바'(飯場=간이 식당)를 이용합니다. 장부에 사인하거나, 식권을 받죠. 일당에 식비(1만 원 정도)를 포함하기도 하는데 이럴 땐 자비로 끼니를 해결해야 합니다. 메뉴는 한식 뷔페로 매일 반찬과 국이 바뀌죠. 가성비로 따지면 절대 나쁘지 않아요. 집밥이 아니니 물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으니까 사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때도 있죠.
그리고 바닥에서 쪽잠을 잘 잡니다. 배고프니까 먹고, 피곤하니까 쓰러져 자는 거죠. 혼자라면 눈치라도 보겠지만 이곳에서는 남들이 그렇게 하니 모두 그렇게 합니다. 볕 좋은 날엔 잔디에서 그대로 눕고, 날 궂은날엔 그 어딘가의 바닥 눕죠. 일용직근로자에게 바닥이란 세상의 밑동이 아니라 삶의 온전한 안식처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백병전을 치르고 난 후의 모습 같죠."
Q. 월평균 수익은 어느 정도 발생하시나요.
"하루 근무 시간은 공수(工數)로 나뉩니다. 오전 7시에 동일하게 출근해 퇴근 시간 따라 △1공수(오후 5시 30분) △1.5공수(오후 7시 30분) △2공수(밤 10시)로 나뉩니다. 하루 일당이 15만원이라면, 2공수를 뛸 경우 30만원을 받죠. 4시간 30분 더 일하는데 일당은 2배라 다들 뛰고 싶어 하죠. 저는 주말을 쉬고 한 달에 400만원쯤 법니다. 운 좋으면 최대 650만원을 번 적도 있지요. 동료의 경우 800만원까지 버는 것도 봤죠. 벌이가 괜찮다 보니 대기업 공사 현장에는 전국의 많은 일용직근로자가 몰려듭니다."
Q. 퇴직자나 제2 인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하실 부분이 있으신가요.
"30여년간의 직장생활이 끝나니, 30여년의 여생이 남더군요. 절대 짧지 않은 삶입니다. 직장의 절반 지점에서 멈춰선 건 불행을 넘어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노후 대비는 미리 해야 한다지만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어도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어요. 일의 연속성, 계속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중요합니다. 직종이나 직급은 문제 되지 않아요. 최근 비계(飛階;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자격증과 경비원 자격증을 땄습니다. 늦게나마 예비보험을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웃음)"
Q.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기자 하던 사람이 일용직으로 일 한다고 하니 믿지 않는 눈치더군요. 하지만 한 달 두 달 버텼고, 어느새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안전하게만 일한다면 일용직근무도 소중한 직업입니다. 솔직히 저마저도 처음에는 시선이 곱지 않았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의 제2 직업이 됐고 자랑스럽습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도 근로자들의 땀방울과 열정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죠."
Q.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용직근무는 신성한 밥벌이입니다. 기자로 벌이했을 때보다 돈의 용처가 확실하고 행복의 총량도 커지는 느낌입니다. 저는 저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 쓸모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가는 2030세대, 그리고 베이비부머들이 함께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막노동 시즌2'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여러 직업을 가지는 'N잡'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습니다. N잡 뿐만 아니라 NEW잡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방준식의 N잡 시대>는 매주 주말 연재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면 기사를 놓치지 않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방준식 기자 silv000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