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에는 내가 당장 취소하거나 사과할 대목이 거의 없다. 단 한 가지 예외, ‘제목’만 빼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 저술가 리처드 도킨스는 본인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 이같이 자평했다. ‘생물은 유전자의 자기복제 속에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다. 그는 “유전정보의 불멸성이 책의 핵심 주제라는 점에서 보다 기운 나는 제목인 ‘불멸의 유전자’가 더 적절했을지 모른다”고 돌아본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리처드 도킨스, 내 인생의 책들>은 도킨스가 쓴 ‘책에 대한 책’이다. 그의 80세 생일을 맞아 2021년 영어로 출간됐다. 전투적 무신론자, 회의론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도킨스가 이번엔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하고 나섰다. 반세기 가까이 저술 활동을 하며 꼽은 ‘인생 책’들에 대한 서평과 에세이, 대담 등 58편의 글을 엮었다.
실재를 다루는 과학과 상상에 기반한 문학. 도킨스는 얼핏 양극단에 있는 둘 사이를 넘나들었다. ‘교양서적은 장황하고 유려한 문체로 써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핵심을 짚었다. 종교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만들어진 신>부터 <확장된 표현형> <눈먼 시계공> 등 그의 저서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은 이유다.
책은 총 6개 장에 걸쳐 진화론과 자연선택, 신앙과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각 장은 유명인과의 대담으로 시작한다.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등이다. 종교인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 종교는 진화의 부산물인지 등 도발적인 문답을 거침없이 주고받는다.
석학들과의 대화 이후 도킨스를 진화생물학의 길로 안내한 책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댄 바커의 <신은 없다> 등 과학책과 과학 소설, 무신론자의 회고록을 넘나든다.
도킨스가 우상으로 꼽은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 대한 평가도 주목할 만하다. 도킨스에 따르면 과학의 최대 기능 중 하나는 ‘헛소리 감지 장치’인데, 그는 세이건의 책을 “이 장치의 사용 설명서”에 비유한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은 잉크가 아까워 밑줄 긋기를 그만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를 두고 “독자는 불행히도 진화론에 대한 완전히 비뚤어진 오해가 적힌 수많은 페이지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리처드 밀턴의 <생명에 관한 사실들: 다윈주의 신화를 깨부수다>에 대해선 책을 출간한 출판사까지 비판한다. 그는 “꼭 헛소리를 듣고 싶다면 차라리 더 재미있고, 멋진 사진이 수록된 종교단체의 소책자를 읽어라”고 일갈한다.
책의 원제는 ‘책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Books Do Furnish A Life)’. 도킨스는 비록 우리가 이기적인 유전자들로 인해 우연히 태어났지만, 그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독서의 몫이라고 말한다. 640쪽에 걸친 책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운이 좋아서 태어나는 특권을 누렸다. 왜 우리 눈이 열리고 지금처럼 볼 수 있는지를, 그 눈이 영원히 감기기 전 짧은 시간 동안 이해할 기회를 선사받았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