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업체에 출고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수 차례 당부했지만, 가격 인상 여부는 기업이 자율적인 결정하는 것이니…” 소주업계 1위 하이트진로가 소주와 맥주 제품 출고 가격을 인상한 지난달 31일 기자가 만난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같이 말끝을 흐렸다.맥주업계 1위인 오비맥주가 지난달 맥주 가격을 올린 데 이어 하이트진로도 소주와 맥주 가격을 이날 인상했다. 이달 9일부터 ‘참이슬’ 출고가는 지금보다 6.9%, ‘진로’ 출고가는 9.3% 오른다. 360mL 병과 1.8L 미만 페트병 제품이 대상이다. ‘테라’와 ‘켈리’ 등 맥주 가격도 같은 날부터 평균 6.8% 오른다.
주류업체의 이 같은 가격 인상에 대해 물가 관리 주무 부처인 기재부와 주류 행정을 담당하는 국세청 등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소주의 가격 인상은 체감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당초 올 초 주류업체가 출고 가격을 인상하려고 할 때 기재부가 제동을 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재부는 최근까지도 주류업체들과의 간담회에서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기재부 관계자들도 소주의 주원료인 주정 가격 상승 등 원가 상승에 따른 가격 인상 요인이 있다는 점엔 공감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도 기재부 측에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사전에 알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부 안팎에선 인상 시기에 대해선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 7월 2.3%까지 둔화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여름철 집중호우로 인한 농산물 가격 인상 등의 여파로 8월 3.4%, 9월 3.7%까지 올랐다.
당초 기재부는 지난 8~9월 반등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월부터 안정세에 접어들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국제유가 상승과 함께 채소류 가격 인하 시기가 당초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10월 수치가 전월 대비 높아졌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 가격까지 인상되면 정부 기대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이트진로가 가격 인상을 발표한 지난달 31일엔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이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물가와 민생 안정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총력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물가 안정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직후 하이트진로가 주류 가격 인상을 공식 발표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업체도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모양새가 이상하게 비친 측면은 있다”고 지적했다.
기재부는 주류업체의 가격 인상에 대해서 공식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다. 자칫 기업의 자율적인 제품 가격결정에 대해 정부가 간섭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출고가가 100원 미만으로 올랐는데 식당 등 소매점에서 판매하는 소비자 가격이 1000원씩 오르는 것은 과도한 인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주류업계는 이번 출고가 인상 여파로 식당이나 주점에서 판매하는 소주 가격이 지금보다 1000원 정도 비싼 6000~7000원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참이슬 360mL 기준으로 출고가는 1166.6원에서 1247.7원으로 81.1원 올랐지만, 식당에선 1000원 단위로 인상하는 곳이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통상 제조사가 공급한 소주는 주류 도매상들을 거쳐 음식점에 공급된다. 정부는 주류도매상들이 사전에 주류 납품 가격의 하한선을 정하거나, 거래처 확보 경쟁을 제한해 나눠 갖는 등 담합을 벌였는지 여부에 대한 집중 점검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9월 맥주·소주 가격 담합 혐의 관련 수도권 지역 주류 도매업 협회에 대한 현장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주류 도매상을 비롯한 주류업체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뒤따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과거에도 주류 가격 인상 자제를 위해 정부가 세무조사 카드를 꺼내든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원가 상승분을 넘는 과도한 가격 인상에 대해선 세무조사와 공정위 조사를 진행할 수도 있다”면서도 “원가 상승 요인 등을 감안할 때 주류업체의 이번 가격 인상이 과도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