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消滅)’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붙었는데도 우리 사회에서 ‘지방소멸’은 사회적 논의조차 필요 없는 ‘정해진 미래’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현 정부가 앞장서서 지방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도, 지방이 살아나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 인식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 경기 침체로 인한 지방세수 및 지방교부세 감소로 재정 여건이 최근 급격히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사회적 난제를 풀어가야만 한다.
지방자치 출범 이후 큰 흐름을 보면 정부는 지방 분권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해 왔다. 지방의 자율성 확대와 중앙정부의 관리·감독이라는 상반된 정책 기조는 갈등과 조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균형을 찾고 점진적 발전을 이뤄냈다. 다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정부는 물론 지자체의 재정 건전성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예컨대 금융위기로 인한 미국 도시의 파산 사태는 지방 정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정 위기의 위험성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된 지자체장의 선심성·낭비성 공약에 대한 관리 감독 필요성의 사회적 정당성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지방자치는 정치적 분권을 전제로 출발한 것이니 중앙정부가 지자체장의 공약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는지는 사실 매우 깊고 복잡한 문제다. 그동안의 건전성 강화 정책은 우리나라 지방 재정을 매우 ‘건전’하게 유지하긴 했지만 지자체의 자율적 혁신 역량은 도약의 계기를 잃어버렸다. 시도하지 않으니 문제 될 것이 없고,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한과 재원이 부족하니 중앙정부의 지원만을 바라보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자치(自治)’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지방이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다.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과감한 규제 개혁과 권한 이양이 전제돼야 한다. 지자체장은 자신의 공약에 앞서, 건전한 재정 운영에 대한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지방분권화는 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될 때 실현 가능하다. 분권화의 싹을 키우려면 지방 재정에 대한 관리·감독에서 점검·평가·컨설팅으로 전환되고 있는 행정안전부의 역할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화를 위한 제도적 틀을 구체적이고 정교한 정책을 통해 실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지방시대 선포식’에서 언급한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약속은 이 같은 어려움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이해된다. 실행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으니 반갑고 기대가 된다.
22일 행정안전부와 지자체가 함께하는 ‘지방재정전략회의’의 슬로건은 ‘진정한 지방시대 구현을 위한 지방재정 운영방안’이다. ‘진정한’이라는 표현에서 고민의 깊이가 엿보인다. 중앙정부가 대폭적으로 권한을 이양하면서 지자체에 건전한 재정 운영의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것이 정책 방향의 요지다. 자율과 책임을 연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치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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