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정직한 신사.’ 유럽에서 외교관의 이중성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한 나라의 외교는 국익 앞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미·일 삼각협력 체제는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한 역사적 쾌거다. 하지만 미·중 패권 전쟁의 격랑에서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같은 미들 파워 국가의 외교에는 ‘작용-반작용의 딜레마(!)’가 있다. 지난 정권처럼 너무 베이징에 밀착하면 워싱턴이 반발하고, 반대의 경우 베이징이 반발하는 것이다.
다행히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중 관계 개선을 제안했고, 리창 총리가 “먼 친척보다 한·중같이 가까운 이웃이 잘 지내면 가치 있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물론 ‘먼 친척’은 태평양 건너 미국을 의미한 것이다.
신(新)한·미·일 공조 체제에 대해 심기가 불편함에도 베이징이 이렇게 화답하는 데는 나름대로 답답한 사정이 있다. 우선 북·중·러 대(對) 한·미·일의 신냉전 체제 속에서 만약 중국이 한국과 대립각을 세우면 반사적 이익을 보는 나라는 북한이고, 중국이 가장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밀착하는 것이 결코 베이징에 유쾌한 일은 아니다. 또 화웨이의 7나노 중국산 반도체를 쓴 최신 5G(5세대) 휴대폰 개발로 한 방 맞은 워싱턴은 앞으로 반도체 제재를 강화할 것이다. 중국으로선 이같이 격렬해질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K반도체의 역할과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가 중국 경제의 위기다. 이 어려운 와중에 제2교역 대상국인 한국과 갈등을 빚는 것이 결코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제부터 눈을 중국 대륙으로 돌려 ‘투트랙(two-tracks)’ 전략을 펼쳐야 한다. 즉 다자 차원에선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안보 동맹에 동참하지만, 양자 차원에선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며 국익 중심의 경제·산업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다. 전략적 자율성을 내세우며 중국과 경제 실리외교를 펼치는 유럽에서 한 수 배울 필요가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강력한 반중 연합 전선에 서지만, 개별 국가 차원에선 베이징에 찾아가 챙길 실속은 다 챙기고 있다. 작년 말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에 가 에어버스 140대를 수주하는 선물을 받았다. 올봄에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중국에서 10여 척의 선박을 발주하고 다량의 에어버스와 헬기를 판매하며 한몫 단단히 챙겼다.
우리도 독일, 프랑스처럼 베이징에 발 빠른 양자적 접근을 해야 한다. 자카르타와 인도 G20에서 윤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의를 거론했다. 하지만 너무 경색된 중·일 관계 때문에 한·중·일 차원의 관계 개선은 힘들다. 10년이 넘었는데도 오리무중인 한·중·일 자유무역협상(FTA)이 그 좋은 예다. 마침 리창 총리가 한·중 FTA의 업그레이드 협상을 제안했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좋은 기회다.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공무원의 아이폰 사용 금지령 등 외국 기업 차별과 애국적 소비운동이 만연하고 있다. 정부도 미국처럼 중국과 관민(官民)이 함께 참여하는 ‘워킹그룹(working group)’을 만들어 우리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야 한다. 지난 8월 방중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워킹그룹을 만들고 벌써 1차 회의를 했다. 한·중 사이에 풀어야 할 꼬인 실타래는 산적해 있다. 올해부터 차별적인 전기차 배터리 보조금이 철폐돼 K배터리의 중국 재진출 문이 열렸다. 또한 우리 기업의 탈중국에 부당하게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중국의 2차전지 소재 업체들이 국내 업체와 손잡고 새만금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중국 규제를 우회해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워싱턴이 IRA의 세부 지침을 마련하면서 엄격한 현지 부품사용 의무를 부과하면 심각한 통상 이슈가 될 수 있다. 이 같은 이슈를 양국 정부의 협력으로 잘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안보는 미·일과 함께하는 전략적 선명성, 그리고 중국과는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전략적 유연성이 우리 국익 외교의 큰 그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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