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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조상 덕 보는 나라 만들기, 지금부터 시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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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쇠솥에서 오래 고아 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담백한 사골국물은 전통 설렁탕의 자존심이다. 요즘 마라탕 같은 자극적인 국물이 유행이라지만, 서울 종로구 견지동 골목엔 119년 동안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의 맛을 이어온 식당이 있다.

1904년 한국의 첫 음식점으로 등록된 이문설렁탕.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두 번 주인이 바뀌어도 뚝배기 국물 맛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문하자마자 토렴한 밥, 국수 위에 푹 삶은 양지살과 머릿고기, 우설, 마나(비장)가 소복이 담긴 설렁탕 한 그릇과 새콤한 깍두기가 놓여진다. 양반들은 밥과 국물을 섞으면 천하다 했지만, 서울 상인의 허기진 배를 빨리 채워주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전설의 마라토너 손기정이 단골이었고 주먹으로 종로를 평정했던 김두한도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오래된 식당은 이렇게 역사를 만들고, 남긴다.


최근 수십 년 된 식당의 잇따른 폐업 소식은 이 장소를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업력 30년 이상 소상공인의 점포를 대상으로 지정하는 ‘백년가게’ 1350곳 중 18곳이 문을 닫았다. 이 중 11곳이 지난해와 올해 폐업했다. 백년가게 제도는 대를 이어 장수하는 소상공인의 성공모델을 확산하기 위해 2018년 도입됐다. 백년가게로 지정되면 중기부로부터 컨설팅과 홍보를 지원받고 소상공인자금 융자에 금리 우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도 벼랑 끝에 놓인 오랜 식당들을 살리진 못했다. 소상공인은 코로나19 직격탄에 이어 원재료·인건비 급등의 쓰나미를 맞았다.

지난해 1월 서울 미근동 서대문경찰서 옆 서대문원조 통술집은 1961년 문을 연 지 61년 만에 밀린 임차료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 서울미래유산 현판이 무색했다. ‘60년 동안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다’는 80세 통술집 할매의 마지막 편지가 가게 문 앞에 붙었다. 퇴근길에 소주 한잔하려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던 인근 직장인들의 허탈한 마음은 무엇으로 달랠까.

서울 노가리 골목의 상징인 을지OB베어는 40년간 뿌리 내린 을지로에서 지난해 쫓겨났다. 백년가게이자 서울미래유산이었지만 개발사업 앞에선 소용없었다. 서울 3대 추어탕집으로 이름을 알린 형제추어탕과 곰보추탕, 1972년 시작된 푸드트럭의 원조 영동스낵카, 72년 전통 중식당 대성관도 줄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100년 정도 된 가게는 노포 사이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시니세’라 불리는 일본의 노포는 100년 된 것이 전국에 1만5000개가 넘는다. 1000년 된 식당도 7개 있다. 1000년의 세월 동안 인절미 꼬치구이를 팔아온 교토 떡집 이치와, 558년 된 소바집 오와리야, 406년 된 초밥집 이요마타는 한국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필수 코스가 됐다.

유럽에서도 오래된 가게를 귀하게 여겨 보존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있는 식당 스티프트켈러는 개업한 지 1200년이 넘었다. 역사 교과서에서나 보던 신성로마제국 시대 803년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이곳에서 식사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유네스코는 스티프트켈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나는 누구인가. 맛있는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만 안다. 라투르다르장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전율이 일어난다.” 근대문학 거장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언급된 라투르다르장은 1582년부터 수백 년째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라투르다르장을 작품에 등장시켰다.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의 작품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오래된 식당이 콘텐츠로 재생산돼 전 세계인에게 울림을 주는 사례다.

시대를 관통해 영겁의 시간을 견뎌냈다는 건 그만큼의 신뢰가 쌓인 것을 의미한다. 낡은 식당의 굳건한 음식철학과 사업가적 통찰은 어쩌면 재개발 사업의 가치보다 더 클 수 있다. 해외 유수의 브랜드들은 오랜 시간이 쌓아 올린 신뢰의 가치를 ‘헤리티지(유산)’라 부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다. 고단한 역사 속에 미처 헤리티지를 이어갈 겨를이 없었던 우리는 조상 덕 보는 유럽을 그저 부러워해왔다. 지금부터라도 후대를 위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를 물려줄 준비를 해야 한다. 현 시대를 사는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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