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생존작가 중 최고가 기록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 비주류 문화를 상징하는 ‘눈 큰 악동소녀’의 아버지, 모든 작품을 혼자 숨어서 작업하는 은둔의 스타….
일본 작가 나라 요시토모(64)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제 그 수식어에 또 하나가 붙게 됐다. 바로 ‘전통 기법을 이어가는 도예 장인’이다. 단색 배경에 어딘가 삐딱한 2등신의 소녀 그림으로 그를 기억해온 사람들을 위한 대규모 개인전 ‘요시토모 나라: 세라믹 웍스’가 지난5일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개막했다. 140점의 도자기 작업과 30점의 드로잉이 그가 직접 구성한 공간 안에 펼쳐진다. 나라 요시토모의 한국 개인전은 2005년 이후 18년 만이다. 전시는 다음달 21일까지 열린다.
기억의 작가, 교실을 옮겨오다
나라 요시토모의 중성적 소녀는 그림 속에서 한쪽 눈을 가리거나 붕대를 감고 등장한다. 불난 집을 바라보거나 칼, 못, 담배를 들고 있을 때도 있다. 측은하기도 하고, 어딘가 무서운 반사회적 요소로 가득하다. 일본의 비주류 문화, 모든 인류가 겪는 유년기의 반항심 등이 뒤섞이며 그의 작품은 1990년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 등에서 최고가 기록을 스스로 계속 경신해왔다.이번 전시는 그가 2007년 일본의 6대 도자기 지역으로 유명한 시가라키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한 이후 제작한 작품들이다. 도치기현 산간 지역, 직접 지은 집에서 고립된 채 작업하기로 유명한 그는 그렇게 도예를 새로 배우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전시는 3층에서 시작해 2층으로 이어진다. 3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포근하고 낯익은 공간이 펼쳐진다. 나무 바닥과 나무 선반들, 손때 묻은 가구와 칠판으로 채워진 옛날 교실의 모습이다. 작가는 실제 자신의 작업실에서 쓰고 있는 가구들을 이번 전시를 위해 옮겨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다들 어디론가 떠난 텅 빈 교실을 ‘악동 소녀’로 채우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투박하고 거친 표면, 동심은 여전해
그의 도자기 작업은 독특한 모양과 질감, 투박한 표면이 도드라진다. 어떻게 보면 미완성인 것 같은 작업이어서 ‘정말 어린 아이가 교실에서 만든 것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가 그동안 초상화에서 표현해온 표정의 디테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입체 작업에도 그대로 담긴다.2층 전시장에선 그가 레지던시에서 만난 ‘친구들’과 협업한 작품들이 놓였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도자기 위에 그가 새겨넣은 ‘Rock N Roll change the world(로큰롤이 세상을 바꾼다)’ ‘We are outlaw(우리는 도망자다)’ 등이 ‘나라의 세계’를 표출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그의 작업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투박한 표면에 손의 촉각을 반영한 청동 조각, 눈을 감은 엄숙한 소녀의 초상화 등은 죽음을 마주한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한다. “누군가는 어린 아이를 그렸다고 하지만 나 스스로는 모두 나의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보다 정제되고 차분해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본다. 마크 글림처 페이스갤러리 회장은 4일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진 유년 시절의 어떤 기억을 독특한 방식으로 끄집어내 우리 모두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