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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걸려 만들었는데 일주일 만에 베끼네"…대책없는 'ETF 카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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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회사가 상장지수펀드(ETF)에 사활을 걸고 있으니…저희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상품을 개발해요. 그런데 치열하게 고민해서 개성 있는 상품을 내놓아도 잠깐만 좋지 대형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방 출시하더라고요. 규모도 확 키워서 상장시키기 때문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요. 그럴 때마다 억울하고 분한 거죠." (한 자산운용사 임원)

ETF 시장에서 다른 운용사가 애써서 내놓은 것을 따라내는 이른바 '카피캣(모방) 상품'이 늘고 있다. 한국거래소가 보다 못해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고 결론냈다. 지수나 상품에 대한 독창성의 기준을 정립하기 어렵고 대형사의 반발이 있는 만큼 당국이 나서기 전에 시장의 자정 노력을 유도하기로 한 것이다.

4일 한경닷컴 취재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최근 한국투자신탁운용과 키움투자자산운용, 신한자산운용 등 중형 운용사들을 한 데 모아 ETF 카피캣을 막기 위한 방안을 수렴했다. 그 결과 제도 개선은 사실상 없던 일로 결론났다. 결국 상품이나 지수의 배타적인 사용권을 인정해 줘야 하는 문제인데, 기업들 모두 모방 관행의 심각성은 공감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독창성을 판단할지는 아무도 방법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앞서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의 대형 운용사들과는 개별 접촉해 의견을 들었다. 이번 중형사 소집 외에도 조만간 소형 운용사나 ETF 시장에 막 뛰어든 운용사들도 한 곳에 모아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여전히 대안은 나오지 않았다"면서 "업계 불만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고 밝혔다.

ETF 시장의 카피캣 논란은 일부 운용사들이 거래소 측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불거졌다. 어느 운용사가 잘 나갈 만한 ETF 상품을 내놓으면 다른 운용사들이 이름만 손본 뒤 곧바로 동일한 콘셉트로 출시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최근만 봐도 히트 상품 직후 모방 상품이 쏟아진 경우는 2차전지 소부장 ETF와 미국 다우존스 배당 ETF 등 빈번했다.

ETF 시장은 규모의 경제여서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베끼기' 앞에서 선점이 무력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일부 운용사들 설명이다. 가령 중소형사가 시도되지 않았던 테마를 ETF로 냈는데 약 두 달 뒤 대형 운용사에서 훨씬 큰 설정액으로 비슷한 상품을 내놓는다면 투자자들은 후발 상품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대형사 상품들은 브랜드 로열티와 풍부한 거래량 등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대형사들이 보수까지 더 깎아서 내놓는다면 중형사들은 더 힘들어진다. 때문에 모방 관행에 대한 불만은 주로 중형사들 사이에서 제기돼 왔다.


현행 규정은 상품별 적용이 어려워 유명무실한 상태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별표 2의3)에 따르면 ETF와 ETN 기존 상품과 기초지수의 구성종목 중복비율이 일정 수준 미만인 경우 신상품으로 인정하고 6개월 정도의 보호기간을 준다. 즉 기존 상품과의 중복비율이 일정수준 이상이면 운용사들은 6개월 뒤에 상장 심사를 신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논리는 지금의 ETF 시장 상황에 적용하기 힘들다. 개별 종목들이 특정 섹터에만 포함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반도체 테마 ETF에만 들어있지 않고 정보기술(IT),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로우볼 등 다양한 콘셉트 상품에 담겨있는 식이다.

한국거래소 측은 당초 이 규정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운용사들의 의견을 구했지만, 각사 면담 결과 당장은 제도 개선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모방 출시를 막으려면 기존 상품의 독창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 인정 기준을 세우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지수의 배타적 사용권 문제는 사실상 운용사와 지수사 간 계약이어서 이들이 계약내용에 관련 내용을 명시하면 되는 문제"라며 "거래소가 개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상품을 두고 독창성을 논해야 할텐데, 이게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정받기 어려다는 판단이다. 업계 간 베끼기를 막는 논의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는데다 참고할 사례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선 최초 상품일지 몰라도 해외에선 이미 나온 상품들이 대다수인 데다, 특정 테마나 섹터를 낸다고 해도 시장 수요를 반영해서 나오는 상품들을 두고 독창성 여부를 따지기도 민망하다"며 "불만만 접수되고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어서 난감하다. 결국 업계 자정노력이 우선돼야 하는 사안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업계에서도 '자정기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산운용사 한 임원은 "지금의 모방 관행이 대형사들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중형사들이 해외 운용사나 국내 대형운용사, 혹은 같은 중형사들의 상품을 모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라며 "자칫 독창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여전히 인력 등 인프라가 잘 구비된 대형사들에게 더 유리할 수 있어 제도 개선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운용사 한 임원도 "우리도 불만을 내비치긴 했지만 이는 제도 개선으로 시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운용사들이 서로의 상품 아이디어를 인정해 주고 일정기간 동안 비슷한 상품을 내지 않도록 하는 관행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증권·운용사들의 모임인 금융투자협회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도모할 창구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고 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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