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의 삶을 실제로 살아본 것처럼 잠시나마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배우라고 부른다. 그럼 좋은 배우란? 수많은 조건 중 단 하나만 꼽으라면 ‘과거를 지우는 기술’일 것이다. 새로운 캐릭터에 온전히 녹아들어 과거에 맡았던 역할을 싹 다 지워버리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배우에게 최고의 칭찬은 ‘저 배우 전에 무슨 역할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는 표현일 것이다.
이병헌(53·사진)은 그런 배우다. 9일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은 또 한번 증명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영화 시사회를 보고 ‘내 눈이 저랬었나, CG로 보정했나’ 싶어 스스로 놀랐다”며 “내게도 이런 눈빛과 얼굴이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영화의 틀에 블랙코미디, 스릴러, 액션을 담은 복합장르 영화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 903동에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병헌은 한 아파트 주민 대표 영탁 역을 맡아 날카롭고 강렬한 열연을 펼쳤다. 주민을 위해 희생하는 리더 역을 맡다 점점 권력에 취해 광기 어린 폭군으로 변화하는 감정선을 흡입력 있게 보여준다. 양극단을 오가는 반전 캐릭터를 연기한 그를 두고 여주인공 명화 역을 맡은 박보영은 “이병헌 선배는 눈을 갈아 끼운 연기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를 두고 이병헌은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은 스토리라는 감독의 첫 마디만 듣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극 중에서 이병헌은 파격적인 비주얼을 선보인다. 처음엔 순박한 중년 남성으로 등장했다가 점차 영웅과 악당을 오가는 강렬한 모습으로 바뀐다. 그는 영화 속 디테일에 관한 아이디어를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를 부르며 추는 ‘아재춤’, 김영탁이 주민 명부에 이름을 쓸 때 ‘ㄱ’ 대신 ‘ㅁ’글자부터 쓰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더 솟구치는 헤어스타일 연출에도 그의 생각이 일부 담겼다. 마지막 장면에선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 얼굴이 겹친다.
“영탁의 헤어 스타일이 M자형 이마로 시작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머리칼이 솟구쳐가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제 팬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도 됐지만 캐릭터 변화를 잘 보여준 모습인 것 같아요.”
43편의 영화와 2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할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그에게 배우로서 어떤 노력을 하냐고 물었다.
“습관처럼 사람들을 관찰해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이 쉽게 읽혀요. 저 사람은 왜 눈을 저렇게 깜빡거릴까? 왜 걸음걸이가 저럴까? 늘 혼자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이해하려고 한달까요. 영탁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우울한 가장, 거기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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