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충남 예산에 있는 정부양곡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800㎏들이 포대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대 9000t까지 저장할 수 있는 거대한 창고에 이런 포대만 5000여 개가 보관돼 있다. 저장된 쌀은 대부분 2021년 10월 생산된 1등급 ‘재고미’인데, 추수 뒤 낟알 상태 그대로 포장해 2년째 창고에 묵혀 두고 있다.
정부의 2021년산 1등급 쌀 매입가는 40㎏에 약 7만5000원. 800㎏으로 환산하면 150만원이다. 3년이 지나도록 방출이 안 되면 이 쌀들은 매입가의 10~20%에 주정·사료용으로 ‘땡처리’된다. 정부가 포대당 120만~135만원을 손해 보고 팔아야 한다. 창고 관계자는 “흉년으로 쌀을 시장에 풀 때도 있지만 보관 기한을 넘겨 주정용 등으로 매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매입해 3년 뒤 헐값에 처분하는 관행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연평균 7000억원이 넘는 ‘혈세’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다. 220만에 달하는 농민 표를 의식한 ‘농(農)퓰리즘’(농업+포퓰리즘)에 여야 할 것 없이 문제를 방관한 결과다.
6년간 쌀 땡처리에 4조원 넘게 투입
지난 5월 농림축산식품부는 보관 중인 정부 양곡 14만t을 올해 말까지 사료용과 주정용으로 7만t씩 특별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2016년 이후 7년 만의 특별 처분이다.
이는 정부가 지난해 큰 폭으로 하락한 산지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상 최대 물량인 77만t(공공비축 45만t, 시장격리 32만t)을 사들인 데 따른 후폭풍이다. 당시 매입 물량은 2년치 적정 재고량(80만t)과 맞먹는 규모였다. 그 결과 쌀 재고량은 올 4월 말 170만t을 넘어섰다. 3500여 개의 정부양곡창고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정부가 일찌감치 땡처리에 나선 배경이다.
특별 처분이 아니어도 매년 50만t 이상의 쌀이 이런 식으로 처분된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공공비축 및 시장격리를 위해 정부가 매입한 양곡을 헐값에 처분해 부담한 판매 손실은 3조2865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농협이나 민간이 보유한 창고 임차 비용 등 관리비 1조1048억원까지 더하면 전체 비용은 4조3913억원에 이른다. 연평균 7319억원이 쌀 땡처리 비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정부와 정치권에서 쌀을 보통 상품과 다른 일종의 ‘정치재’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 쌀 산업은 만성 공급과잉 상태다. 수요 대비 연평균 20만t의 쌀이 초과 생산된다. 고령화·도시화로 1988년 126만㏊에 달한 쌀 재배면적이 지난해 73만㏊로 42% 줄고, 연간 쌀 생산량은 605만t에서 376만t으로 38% 감소했지만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22㎏에서 57㎏으로 53% 급감한 결과다.
그럼에도 그간 정부와 정치권은 수급 조절을 통해 예산 낭비를 줄이기보다 쌀 농가 보호를 명목으로 쌀값 부양에만 치중했다. 정부는 2005년부터 ‘식량안보’ 목적으로 매년 40만t가량의 쌀을 매입해 2개월치 소비량인 80만t을 상시 준비하는 공공비축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후 지난해까지 18년간 10차례에 걸쳐 공공비축분 이상을 추가로 사들이는 시장격리 조치가 이뤄졌다. 쌀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정치권의 수매 압박이 들어오고, 정부 역시 예산을 투입하는 식의 악순환이 이어져온 것이다.
정치 도구 된 쌀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까지 막은 ‘양곡법 개정안’도 나랏돈 새는 걸 무시한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꼽힌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한 양곡법 개정안은 매년 초과 생산된 쌀 전량을 정부가 의무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남는 쌀을 정부가 전량 의무매입할 경우 2030년 쌀 초과 공급량이 63만t으로 현재의 3배에 달하고, 2030년 쌀 격리·보관·매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1조4659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의 2배에 달하는 예산이 낭비될 것이란 전망에도 민주당은 양곡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관련 법안은 무산됐지만 민주당에선 이후에도 유사 법안 발의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그간 쌀 산업 보호를 위해 투입한 비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후 국내 쌀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20년간 쌀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 매년 40만8700t의 외국 쌀을 의무적으로 들여오고 있다. 자급률이 100%에 가까울 정도로 쌀을 과잉 생산하는 상황에서 외국 쌀까지 들여와야 하는 것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