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구개발(R&D) 금액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가는 30조원, 민간 R&D는 80조원에 달한다. 납세자이자 주주인 국민이 힘든 삶에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정부와 연구자를 믿고 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편에 속하지만(2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 과학기술혁신역량 분석에 따르면 성과는 미미하다(36개국 중 10위). 오죽하면 대통령이 ‘R&D 카르텔’이라고 혹독하게 언급했겠나.
카르텔은 이론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담합을 어겼을 때의 이득이 달콤하기 때문에 배신이 나온다. 예외적으로 유지되는 카르텔은 예를 들면 마피아와 같은 제3자가 배신을 막는 경우다. 폭력과 같은 특별한 수단으로 말이다. 공교롭게도 현대 대한민국에서 마피아라는 용어가 가장 친숙하게 활용되는 개념이 ‘관피아’다. R&D 카르텔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가 R&D의 문제점을 거칠게 살펴보면 첫째, 국가 전략과 R&D가 조응(照應)하지 않는다. 전략이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해 찾아낸 냉정한 선택과 집중이다. 문제는 정부 부처가 자기 소관 임무에 무차별적으로 막대한 R&D를 챙겨 넣는다는 것이다. 올림픽 전 종목에 출전하지만 특별히 최고 수준을 보이지 못하는 선수단과 비슷해 보인다. 둘째, 도전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격은 재빠른 모방자(fast follower)에서 창의적 선도자(first mover)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그러나 R&D 사업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거나 연장하고 확대하는 데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글로벌 기술패권 시대에 국가 경쟁력의 폭발적 증대와 우리 사회 및 인류 문명에 대한 확고한 기여를 임무로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셋째, 과학적인 성찰이 없다. R&D는 지속적인 연구의 과정이다. 당연히 빅데이터 분석 기반의 과학적 관점과 가치관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 R&D 관리는 안이하기 이를 데 없어 과제 성공률이 98%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왔다. 수없이 많은 중소기업 R&D가 연구는 성공했는데도 사용하는 중소기업이 없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국민의 가치관이나 사회 제도와 맞지 않는 연구, 정부 방침상 수용 불가능한 R&D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 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악순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이런 문제점들의 직접적인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대부분의 R&D가 나눠 먹기로 배분된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R&D 좀비’의 창궐이다. R&D 예산으로만 생존하는 기업과 연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부와 산하기관이 요구하는 행정 절차에 딱 맞게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들의 특기다. 좀비의 특징은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옆에 있는 대상을 물어서 또 다른 좀비로 확대 재생산하는 데 있다. 좀비들이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면 인간은 도망쳐서 숨기 마련이다. 건강하고 도전적인 연구자가 바로 그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더 이상 R&D를 일반행정의 틀 속에 가둬서는 안 된다. 일반행정은 투입을 조정하고 기존 규율에 맞춰 과정을 통제한다. 대충 어지간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R&D는 이런 과정에 더 이상 맞춰서는 안 된다.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며 적극적인 연구자들이 어떤 답이나 과정도 주어져 있지 않은 최첨단 과제를 연구하게 해야 한다.
글로벌 차원에서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교류하게 할 필요도 있다. 탁월한 제안과 도전적인 접근 방법을 알아볼 만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충분히 숙의하고 토론하는 과학계 분위기도 조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극도의 자율성과 유연성은 필수다. 후불형 포상금 같은 파격적인 인센티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를 어떻게 구현하느냐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다.
한두 개의 뿌리를 뽑는 타파나 비리 색출로 될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오히려 현장의 경직성만 심해져서 일반행정으로 퇴행할 것이다. 일반행정 R&D는 여전히 카르텔의 손바닥 안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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