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53번가의 뉴욕현대미술관(MoMA·모마). 1층 로비에 들어서면 8m 높이의 초대형 디스플레이가 맞이한다. 화면에는 화려한 색상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한 영상이 담겨 있다. ‘비(非)감독(Unsupervised)’이란 이름이 붙은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다.
세계 3대 현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모마에는 더 이상 ‘예술가의 경계’가 없다. 회화, 조각 등 기존 카테고리를 넘어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디지털 작품이 전시관 곳곳을 채우고 있다. 비디오 아트 작품부터 게임, AI까지 디지털 시대에 인간과 상호작용해 온 기술은 전통 예술의 정의에 물음표를 던진다.
AI, 게임이 채운 현대미술관
지금 모마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 거리는 AI 작품 ‘비감독’이다. 튀르키예 출신인 작가 레픽 아나돌이 설치한 이 작품은 AI에 모마가 200여 년간 수집한 근현대 작품 13만8000여 점을 학습시킨 뒤 시각화했다. 여기에 그날의 날씨와 빛, 관람객의 움직임과 소리를 함께 반영해 이미지를 만든다. 반 고흐, 모네, 피카소 등 옛 거장들의 손놀림이 최첨단 기술과 하나로 어우러진 작품이다.지난해 말 모마에 이 작품이 전시되자 뉴욕 예술계에선 ‘AI의 작품을 현대 미술로 받아들인 중대한 사건’이란 평가가 나왔다. 1층 전시관에는 ‘혼자가 아니다(Never alone)’란 주제로 비디오 게임 및 관련 산업 디자인을 담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래픽 게임 ‘팩 맨’(1980년) ‘심시티’(1993년) 등 인기 게임이 플레이된다. “게임은 단순한 오락일 뿐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의도적인 마찰과 혼란을 주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상호 작용한다”는 게 모마 측 설명이다. 마우스를 움직이면 바람 흐름에 따라 꽃잎이 흩날리도록 설계된 ‘꽃’(2009년·제노바 챈)은 목적 없이 자연의 변화를 즐기도록 설계됐다. 정해진 미션을 수행해 ‘클리어’하는 대신, 감상과 몰입 그 자체를 주제로 하는 게임인 셈이다.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
10여 년 전만 해도 게임은 지금의 AI와 비슷한 신세였다.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 하는가’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2011년 미국은 게임을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했고, 국내에서는 지난해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비로소 게임이 법적으로 문화예술 카테고리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금 서울관에서 모마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이 소집한 비디오 게임 소장품 등을 소개하는 전시 ‘게임 사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이다.모마의 꼭대기층(6층)엔 1960~1970년대 예술계의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킨 비디오 아트 작품이 총망라돼 있다. ‘시그널, 비디오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가(Signals: How Video Transformed the World)’란 주제로 마련된 전시에는 과거 독재와 전쟁, 차별의 역사 속에서 비디오아트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1984년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동시 생중계되며 세계화 시대를 알린 고(故) 백남준 작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도 있다. 거대한 인공 돔에서 끊임없이 비디오 이미지를 재생하는 ‘무비드롬’(스탠 반더비크, 1965년), 일본의 수은 중독 시위 촬영을 통해 기업 욕망의 폐해를 고발한 ‘비디오 다이어리’(나카야 후지코, 1972년), 미디어가 재생하는 이미지의 허구성을 고발한 작품 ‘깨진 유리’(송동, 1999년) 등 논란의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모마는 기술을 적용해 영감을 주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예술로 인정해 왔다. 과거 ‘사진이 예술인가’란 논쟁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사진 전시관을 설치한 곳이 바로 모마였다. 지금 모마를 가득 채운 기술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어디까지가 예술의 경계인가. AI 시대에 예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인가.’
뉴욕=정소람 특파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