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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 도와준다" 비난에도 러시아 원유 대량수입
인도가 안 했다면 '3차 오일쇼크' 벌어졌을 것이란 분석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지난주 미국을 국빈 방문해 환대를 받으며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인도는 미국의 제재를 무시하고 러시아산 원유를 대량으로 수입해 눈총을 받아왔다. 미국은 그런 인도에게 전투기 엔진 기술을 이전하고, 군용 무인기(드론)인 MQ-9B 시가디언을 판매하는 등 풍성한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이 같은 우호적인 조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인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전쟁 자금을 대준다는 비판이 여전함에도 미국이 눈을 감아준 셈이다. 인도는 러시아 석유를 수입해 내수용으로 사용한 것도 모자라 원유를 정제한 뒤 유럽에 수출해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인도의 이 같은 행태를 묵인한 것은 단순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의견이 나와 흥미를 끈다. 인도가 규제를 철저히 준수했다면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를 넘겨 '3차 오일쇼크'가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급증한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
인도 프레스 트러스트 통신에 따르면 인도는 지난달 하루 평균 196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했다. 월간 수입량은 8개월 연속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넘어서고 있다. 인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2022년 4월부터 러시아로부터 석유 수입을 늘리기 시작했다. 전쟁 전 2%에 불과했던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비중은 지난 5월 40~50%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러시아는 전년도 10위에서 인도의 최대 석유 공급국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미국을 시작으로 7개국(G7)과 유럽연합(EU)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제한했으나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기 때문이다. 2018년 이란 제재와 달리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배럴당 60달러로 가격 상한선만 설정했을 뿐 수입 업체를 직접 겨냥하진 않았다. 제재 전 이란은 하루에 약 35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는데, 이 정도 물량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의 증산으로 충분히 감당 수 있다고 판단 전면 금수조치를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제재 전 수출 규모는 일 800만 배럴에 달했고 주로 유럽으로 수출했다.
느슨한 규제를 활용해 인도는 지난 3월 인도는 일평균 102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했다. 인도 상공부에 따르면 이는 전년 대비 11배 증가한 양이며 인도 석유 수입량의 20%에 달한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인도 현지에서 기자들을 만나 "인도 은행에 쓸 수 없는 수십억 루피화가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국제결제망 제재 등을 피해 루피화 거래를 통해 인도로 수출했다는 얘기다. 다만 이를 본국으로 충분히 환전해 가져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싼 값에 원유 들여와 유럽에 팔기도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에너지정보업체 케이플러 데이터를 인용해 지난 4월 인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가장 많은 정제유를 유럽에 공급했다고 보도했다. 정제유는 원유 가공품으로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을 포함한다. 인도가 유럽에 수출한 정제유는 하루 36만5000배럴로, 사우디(일 34만4700배럴)를 넘어섰다. 유럽 석유 무역 허브인 네덜란드에 대한 인도의 석유 제품 수출은 지난해 70% 급증해 전년도 3위에서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심지어 미국도 인도로부터 원유와 석유 제품 수입을 늘렸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1월 기준 월 156만배럴이었던 수입량이 지난 2월 495만배럴로 3배 넘게 증가했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싸게 사들여 적지 않은 차익을 남기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 정부 관계자는 블룸버그 통신에 "러시아가 G7 제재 가격(배럴당 60달러) 이상은 받지 못할 것"이라며 "인도가 제재를 준수하고 있다"며 감쌌다. 그러나 판카지 자인 인도 석유비서관이 오히려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상한가보다 높은 가격에 수입하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제재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공공연히 밝혔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인도가 러시아에 제시한 가격은 배럴당 70달러 수준으로 알려져다. 당시 브렌트유 시세(배럴 당 105달러)보다 30%가량 낮은 수준이었다. 규제를 위반하고 상한가인 배럴당 60달러를 넘겨서 수입해도 인도는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석유 메이저 기업 자회사를 모태로 1970년대 국영 기업으로 설립된 인도 정유사들은, 1990년대 민영화 후 막대한 자국 수요를 바탕으로 규모를 키웠다. 인도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낮추거나 선거를 위해 빈번하게 가격을 통제하자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인도가 '더러운 역할' 완벽하게 수행했다"
모디 총리의 '인도 우선주의'가 러시아의 전쟁을 도와준 면이 있음에도 무역 수치를 면밀히 살펴보면 서방이 인도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닛케이아시아는 최근 국가별 석유 수출입 상황을 분석해 "인도의 이기적인 정책이 다른 나라에도 큰 도움을 줬다"며 "인도는 세계에서 원유 수입량 3위이자, 석유 제품 수출 규모는 4위인 석유화학 대국이라 석유 및 석유 제품의 글로벌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서부텍사스원유(WTI) 1개월 선물 가격이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서는 등 혼란이 벌어졌다. 미국은 부랴부랴 전략비축유룰 방출하고 눈엣가시 같은 베네수엘라의 원유 수출을 허용하고, 이란 제재 완화까지 검토해야 했다. 그래도 유가는 잡히지 않았고, 결국 유가를 70달러대로 다시 끌어내린 것은 러시아로 수입선을 돌린 중국과 인도 덕분이란 얘기가 나온다.
인도가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을 급격히 늘리고 서방 공급업체를 통한 수입을 줄인 덕분에 유럽 및 기타 국가의 물량을 댈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인도는 2022년 나이지리아산 석유 수입을 49% 줄였고, 미국에서 24%,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물량도 각각 18%,10%씩 수입을 줄였다. 덕분에 이들이 유럽과 동아시아 등에 대한 수출을 늘렸다. 닛케이아시아는 "G7과 EU는 본격적인 위기를 피하기 위해 인도에게 러시아 석유를 구매하는 '더러운 일'을 맡겼고, 인도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더불어 서방에선 중국이 러시아산 석유를 독식해 러시아가 사실상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상황도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