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엘리엇이 “국민연금을 압박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성사시켜 손해를 입혔다”며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에서 한국 정부가 약 69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정이 나왔다.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 중 7%만 받아들여지면서 대규모 배상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다.
PCA 중재판정부는 20일 엘리엇이 2018년 7월 제기한 중재 신청에 대해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달러(약 690억원)를 배상하라”는 최종 판정을 내놨다. 엘리엇이 청구한 손해배상금의 약 7% 수준이다. 법조계에선 당초 예상보다 선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연이자와 법률 비용 등을 합하면 1,300억 원대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PCA 중재판정부는 배상 원금에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까지 5% 연복리 이자를 지급하라고 정부에 명했다. 또, 엘리엇이 정부에게 법률비용 345만달러(약 44억 5000만원)을 지급하고 정부는 엘리엇에게 법률비용 2890만달러(약 372억 5000만원)를 지급하라고 했다.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들고있던 국민연금은 2015년 7월 10일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를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내용은 다음날인 7월 11일 시장에 알려졌다. 엿새 뒤인 7월 17일 삼성물산이 연 임시 주주총회에서 총 9202만3660주(총주식의 58.91%)가 합병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다. 2.43%포인트 차로 해당 안건의 특별결의 요건(발행주식 수의 56.48%)을 충족했다.
엘리엇은 이번 국제중재 과정에서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합병을 성사시켰고, 이로 인해 엘리엇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던 중 대법원이 지난해 4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모두 징역 2년6개월)의 유죄를 확정하면서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긴 어려워졌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하지만 지난 1월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엘리엇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워 국가를 상대로 약 9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반전의 조짐이 나타났다. 판결을 내렸던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2부는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주식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합병이 무산됐을 때 기금운용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 독자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며 “문 전 장관 등이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인정하나 이 같은 직권남용 행위와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이날 판정문을 면밀히 분석해 불복 절차 등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그간 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과 합동 대응체계를 구성해 ISDS 절차를 밟아왔다.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시작된 2018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대응해 왔다"며 "앞으로도 국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ISDS의 판정 선고 후 판정부의 이유 불기재, 절차규칙 위반 등의 문제가 발견될 경우 120일 안에 취소 신청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가 예상보다 선방하면서 쟁점이 같은 메이슨캐피탈과의 ISDS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메이슨이 청구한 배상액은 2억달러(약 2570억원)다. 정부와 메이슨간 ISDS 역시 변론 절차가 종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만간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정부는 이외에도 스위스 기업 쉰들러와의 분쟁(손해배상 청구액 1억9000만달러) 등 다섯 건의 ISDS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론스타와의 ISDS는 지난해 8월 론스타 청구액의 4.6%인 약 2800억원을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정부는 현재 배상액 전부를 무효로 하기 위한 불복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김진성/권용훈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