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주의는 사회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개념이다. 엘리트주의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정당화되고, 인류 역사는 오랫동안 그런 공식에 의해 지배돼 왔다.
엄밀히 말해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와 상충한다. 엘리트주의는 각종 불평등을 초래하며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 한 사회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영국에서 출간되며 화제인 <종말(End Times)>은 다시 한번 엘리트주의의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엘리트와 반엘리트, 그리고 정치적 붕괴의 길’이란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엘리트 세력이 어떻게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려고 하는지, 그것에 대항하는 반엘리트 세력은 어떻게 형성되고 서로 간 팽팽한 긴장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생겨나는지 설명한다. 또한 향후 수십 년 안에 미국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인 피터 터친은 동물학 전공자로, 미국 코네티컷대 진화생물학부 명예교수면서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연구교수다. 그는 ‘역사동역학(Cliodynamics)’ 연구의 선구자인데, 역사동역학은 역사적 데이터와 수학적 모델을 활용해 고대 제국과 근대 민족국가들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새로운 학문이다.
터친 교수는 이런 연구를 통해 인간 집단을 하나로 모으는 사회적 힘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실패하는지 탐구하며 사회의 미래 불안정성을 예견한다.
책에 의하면 최하층의 빈곤이 심해지고 최상층의 엘리트주의가 극심해질 때 그 사회의 붕괴 가능성은 커진다. 빠르게 늘어나는 부와 임금의 불평등, 넘쳐나는 대학 졸업생, 공공 부채의 통제할 수 없는 증가 등과 맞물려 사회에서는 여러 붕괴 신호가 포착된다.
저자는 미국과 영국에서 1970년대부터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2020년 전후에는 이런 추세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정치적 불안정성이 급증할 것으로 예측한다. 사회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두 가지 원동력은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빼앗아 부자에게 주는 ‘왜곡된 부의 펌프’, 엘리트와 과잉 생산으로 발생하는 ‘권력과 지위를 향한 치열한 경쟁’이다.
“1983년 미국에는 10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가구가 6만6000가구였는데 2019년에는 인플레이션을 조정한 수치로 69만3000가구로 증가했다. 슈퍼리치 수가 늘어나는 동안 일반 미국인의 소득과 재산은 감소했다.”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금권정치, 그들의 재산 뒤에 터무니없이 많이 붙어있는 0의 자릿수 등 책은 지금 상황이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강조한다.
소득이 감소하는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의 분노, 졸업장에 걸맞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대졸자들의 좌절, 그리고 우파 노동 계급 포퓰리스트와 좌파 엘리트 진보주의자들을 모두 자극하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반엘리트 정치사업가의 등장이 미국 사회를 파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경고한다.
역사는 우연인가, 아니면 과학인가. 미국 사회는 정말 이대로 붕괴할 것인가. 책은 흥미로운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설득력 있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분석을 내놓는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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