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렛트가 없었다면 아직도 수백만명의 근로자가 육체적인 혹사를 당하고 있을 겁니다.”
14일 서울 마포구 집무실에서 만난 서병륜 로지스올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사에서 파렛트풀 시스템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서 회장은 국내에 파렛트풀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파렛트란 물류센터나 공장 등에서 물자를 쌓아놓을 수 있는 받침대다. 단순한 받침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파렛트 위에 500kg~1t 무게의 물건 쌓아놓으면 지게차가 한꺼번에 실어나를 수 있다. 파렛트풀 시스템(화물의 받침대인 파렛트를 표준규격으로 통일해 기업 간에 공동으로 이용하는 제도)은 물류와 노동 현장의 ‘혁명’이었던 셈이다.
로지스올그룹은 이러한 파렛트풀과 컨테이너풀 등을 기업에 대하는 사업 등을 통해 지난해 매출 2조원을 기록했다. 농산물, 식품음료,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 등 전 산업에 걸쳐 고객사만 30여만개에 이른다.
서 회장 집무실과 회의실에는 ‘공존공영’을 한자로 적은 경영 정신이 벽에 걸려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물류는 일방 주도가 아니라 쌍방이 상호협력하는 분야”라며 “수백만명의 물류인이 함께 참여하고 있어서 가능한 사업모델”이라고 부연했다.
40년간 물류 외길을 걸어온 서 회장은 “접이식 컨테이너 ‘폴드콘(FOLDCON)’을 개발해 운임 비용은 줄이고, 작업 속도와 보관 능력을 높여 세계 무역 물동량의 물류시스템 혁신에 도전하겠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서 회장은 서울 마포구 본사에 물류 전문 도서관을 운영 중이다. 입구에는 ‘책 속에는 길이 있다. 물류도서관에는 물류의 길이 있다’는 서 회장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로지스올 물류 도서관에는 물류 분야 5000여권과 경영 서적 2000여권 등 약 7500권이 소장돼 있다. 모두 서 회장이 직접 읽고 도서관에 비치한 책들이다. 공공기관이나 일부 대기업에서 사내 도서관을 접할 수 있지만, 중견기업 중에서는 이례적이다. 서 회장은 “항상 책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입수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찾았다”며 “해외 출장 중이나 사무실에서나 물류 전문 서적을 찾아 나서고, 가장 중요한 일과”라고 소개했다.
대우중공업에서 지게차 영업마케팅을 하던 서 회장이 물류에 눈을 뜨게 된 배경도 책에 있다. 서 회장은 일본 하역연구소 히라하라 스나오 소장의 저서 ‘하역과 기계(荷役と機械)’와 일본 통상산업성에서 국가 차원 국책과제로 추진하던 파렛트풀시스템의 홍보 책자인 ‘물류 시스템화 가이드(物流システム化の手引)’ 2권을 두고 “운명을 바꾼 책”이라고 밝혔다.
특히 일본 정부 발간 서적에 대해 서 회장은 “그 책을 통해 사업전략을 세웠고, 한평생 들여다보고 있다”며 “결국 일본 정부 구상대로 된 건 우리 회사이고, 일본보다 현재 훨씬 큰 회사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농대 출신인 서 회장은 책에서 경영을 배우고 있다. 서 회장은 “농대를 나와서 인사, 회계 이런 분야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며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지만 주로 책을 보는 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아갈 길을 못 찾아 헤매던 물류의 길목마다 답답함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을 풀어내려고 항상 관련 서적을 찾아다니다 보니 책과 더 가까워졌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서 회장과 일문일답
▷어떻게 물류분야에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지요.
“1977년 대우중공업 지게차 생산 공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게차 판매 부진에 시장을 개척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해외 선진국 사례를 찾아보니 기업들이 ‘화물 받침대’인 파렛트를 표준화해 공동으로 사용하는 파렛트풀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파렛트풀 도입 관련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지만 진척이 쉽지 않았고, 결국 지게차 공장으로 돌아가라는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하지만, 물류협회와 파렛트풀에 사명감을 느껴 사직하고 1984년 물류연구원을 세웠습니다.”
▷회사 대신 연구원을 차린 이유가 있을까요.
“연구원을 세우고 물류 관련 컨설팅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물류협회 업무를 주로 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남아, 1985년 한국파렛트풀을 차렸습니다. 일본 회사에서 파렛트를 빌려서 렌탈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 6월25일자 한국경제신문 1면 톱기사로 한국파렛트풀 창립이 소개됐습니다. 왜 조그마한 민간기업의 출발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었을까요. 파렛트풀시스템이 한 국가의 경제를 움직이는 혈액순환체계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맨손에서 시작한 회사가 40년 사이 엄청 커졌는데 현재 규모는 어느정도인지요.
“현재 로지스올 계열사인 한국파렛트풀은 2700만매의 플라스틱 표준 파렛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연간 약 1억매를 공급하고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른 계열사인 한국컨테이너풀은 5000만 매의 컨테이너를 보유하고, 연간 2억매 정도가 국내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류분야에서는 물자를 일정한 단위적재체제로 표준화된 용기와 파렛트에 쌓아 움직이게 하는 것을 유닛로드시스템이라고 합니다. 로지스올그룹은 유닛로드시스템 분야에서 전 세계 3위 규모입니다. 특히 플라스틱 파렛트풀 사업자로서는 한국파렛트풀이 현재 규모나 이용 고객 수에 있어서 글로벌 챔피언입니다.”
▷현장에 파렛트풀이 보급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고요.
“파렛트를 사람들이 받침대용으로만 쓰고 있었습니다. A사에서 B사로 물자가 이동할 때 파렛트 위에 쌓아놓은 그대로 옮기면 되는데 당시 그걸 못하고 등짐을 졌습니다. 완전 인력작업이었죠. 파렛트풀 시스템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중도농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 상태로 지게차가 번쩍 들어서 트럭에 실으면 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웠던 순간과 보람된 점을 꼽아보신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물류표준화와 물류공동화 실현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물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라 만만치 않았습니다. 파렛트풀이나 컨테이너풀은 기업들이 표준파렛트나 표준컨테이너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제도입니다.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닌 국가 단위의 거대한 물류 인프라 구축사업입니다. 개별 기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포장용기 컨테이너와 물자 적재 파렛트는 각자 사정에 따라 형태와 규격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이를 국가 표준규격으로 바꾸게 하는 일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산업현장의 물류작업을 기계화, 자동화해 인간을 중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40년이 된 지금은 어떤 물류작업도 인간의 힘으로 하지 않고 지게차나 물류자동화 설비로 대체하는 물류선진시스템을 실현시켰습니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로 시장을 확대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모델들을 해외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현재 15개국 19개 해외법인을 설립해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일본, 북미, 남미, 유럽 등을 망라한 전 세계 무역 물동량을 로지스올의 시장으로 보고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접이식 컨테이너를 개발중입니다. 빈 컨테이너가 되면 단순 인력작업으로 4분의 1 높이로 접을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이를 4개 단위로 묶어서 고정식 컨테이너 1개와 같이 이동할 수 있게 되는데 회송 운임의 75% 절감, 작업 속도 4배 증가, 항만보관 능력 4배 증가 등 물류혁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현실화하면 글로벌 해상용 컨테이너의 순환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어 세계 무역 물류 혁명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발달이 물류산업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요.
“물자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 예측이 가능한 시대가 됐습니다. 파렛트에 사물인터넷을 적용해 빅데이터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성전자나 현대차에서 주문한 부품이 며칠 뒤에 도착하는지 당연히 궁금할 것 입이다. 그에 맞춰서 생산 스케쥴을 짤 수 있고, 판매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전자태그(RFID) 칩을 파렛트에 달아놓게 되면 물자 흐름을 추적 관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물류인력난에 대비해 로지스올엔지니어링을 설립했습니다. 물류작업현장 대부분을 자동화,?무인화,?로봇화 하기 위한 엔지니어링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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