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순가련. 1996년 신승훈 '내 방식대로의 사랑' 뮤직비디오로 데뷔한 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배우 명세빈에 대한 수식어다.
올해로 데뷔 33년.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연기를 보여줬지만, '청순가련'이란 타이틀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명세빈은 JTBC 주말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최승희 역을 맡아 대학 동기이자 병원 동료인 서인호(김병철 분)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오는가 하면, 인호의 아내 차정숙(엄정화 분)을 견제하고 괴롭히는 악녀 연기를 선보였다. 불륜 빼곤 모든 게 완벽했던 승희를 연기하며 명세빈은 "저 역시 성장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청순가련'에 갇혀 있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데뷔 초에 있던 이미지가 계속 덧입혀진 거 같아요. 탈피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진 않았어요. 이번에 감독님, 작가님 덕분에 새로운 캐릭터를 할 수 있었어요."
시청률 4.9%(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로 첫 방송을 시작한 '닥터 차정숙'은 4회 방송 만에 두 자릿수 시청률을 돌파했다. 이후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18.5%로 막을 내렸다. 승희를 욕하는 사람에게 "불륜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내 입장도 있다"고 말할 만큼 명세빈은 승희에게 큰 애정을 보였다. 승희가 정숙보다 먼저 인호와 연인 사이였고, 그가 해외 세미나에 참석한 사이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아이가 생겨 결혼했기 때문. 유부남이 된 인호는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승희와 재회했고,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생기면서 불륜이 이어졌다.
복잡한 설정의 승희를 연기하기 위해 명세빈은 먼저 캐스팅된 엄정화, 김병철 등 "먼저 캐스팅된 배우들을 차례로 찾으며 대본을 함께 읽었다"고 말했다. 경력 30년이 넘은 배우가 신인의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하니 '닥터 차정숙' 촬영장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제가 가장 나중에 캐스팅됐는데, 승희는 1차원적인 불륜녀가 아니었어요. 작품 안에서 전사와 감정이 쌓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석하고 소화해서 갖고 있어야 했죠. 그래서 준비된 배우들을 먼저 찾아갔어요. 이미 숙성된 생각을 가진 그들에게 물으며 많은 도움을 얻었죠."
특히 엄정화에 대해 "극 중에서는 항상 대립했는데, 카메라 밖에서는 종교도 같아서 같이 새벽기도도 하고 언니랑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신났다"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언니는 대스타이고 디바인데 드라마에서 소탈하게 엄마 역할을 하는 게 신기했어요. 언니가 성격이 정말 좋아요.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저렇게 많은 것을 흡수하고 포용해야겠다' 싶었죠."
승희는 의료재벌가의 딸이었지만 인호와 사이에서 생긴 딸을 가족들의 불구에도 낳으면서 집안에서 버림받는다. 그런데도 인호는 정숙과의 가정을 유지하고, 19살이 된 딸 최은서(소아린 분)가 "저 남자는 엄마에게 오지 않는다"며 불륜을 인호 가족들에게 폭로하기 전까지 이 관계는 이어져 온다.
많은 시청자가 궁금해했던 "부족함 없는 승희는 왜 인호에게 절절맸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명세빈은 "인호도 병원장 아들이었고, 부모님의 직업도, 집안 분위기도 비슷해서 공감대가 형성됐을 거 같다"며 "외족으로는 화려하지만, 가족에게는 결핍이 있었던 승희가 인호에게 의지하고, 남에게 하지 못하는 얘길 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승희가 욕먹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파서 '내가 이 정도인데, 우리 딸은 어떨까' 싶어서 많이 걱정했다"며 "너무 짠했다"고 '찐' 엄마의 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저는 나이를 먹어서 괜찮지만, 저희 딸(소아린)은 이번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메시지를 남겼죠. '처음엔 무서웠다'고 하길래, '견디자' '화이팅' 해줬어요."
'닥터 차정숙'이 정숙만의 성장이 아닌 승희, 그리고 인간 명세빈의 성장을 이끌었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며 시청자 명세빈으로서 "인호가 정숙에게 뺨을 맞는 장면을 보면서 저도 너무 통쾌했다"며 "'정말 잘됐다' 싶었다"면서 웃었다.
"저희 드라마는 쉽지만, 마냥 예상대로 흐르진 않아요. 정숙이 남편의 불륜을 먼저 알고 '우리 아이들은 절대 알면 안 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먼저 알고 '엄마는 절대 알면 안 돼'하는 게 새로운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일반적인 내용을 새롭게 접근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그래서 재밌는 드라마가 된 거 같아요."
'닥터 차정숙'을 만나기 전까지 프랑스 꽃예술 전문학교의 국내 수업을 들으며 플로리스트를 준비했던 명세빈은 "이 작품을 하면서 '나는 배우였구나'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면서 "내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없어서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연기에 집중하려 한다"고 계획을 전했다.
"'닥터 차정숙'은 제가 앞으로 삶을 되돌아봤을 때 중요한 지점으로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이 작품을 통해 또 다른 명세빈을 보여준 거 같고요. 어떤 작품이든, 어떤 역할이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