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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1표 정치로 경제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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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탓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 뒤의 설명은 더 묘했다. “이런 체제에서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돌봄노동의 가격이 시장 수급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각주를 통해 영국의 도시 기반 업무를 맡고 있는 돌봄, 마트, 택배, 청소 근로자 등 이른바 ‘핵심 일꾼’에 대한 처우 개선 사례를 소개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문은 네 가지였다. 첫째, 흔히 ‘이모님’으로 불리는 가사·육아 도우미를 고용할 때 우리 마음대로 보수를 정할 수 있나. 둘째, 실정이 그러하다면 그들은 원하지 않는 노동을 강제로 하고 있다는 것인가. 셋째, 이런 시장에 외국인 가사 도우미는 왜 들어오려고 하나. 넷째,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면 추가 부담은 누가 져야 하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장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 “관행과 제도 변화를 통해 돌봄 노동을 복지체계로 공식 편입시키고 임금과 근로환경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 노동을 시장에 맡기지 말고 정부가 직접 나서라는 주문이었다.
닥치고 복지국가 건설?
문 전 대통령은 장 교수가 제시한 통 큰 복지국가론에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1인 1표 정치로 시장을 몰아내면 국민 삶을 구석구석 살피는 빅브라더 정부 건설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시장론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맹폭하고 있는 장 교수는 놀랍게도 ‘결과의 평등’까지 내달렸다. 그는 “인생의 경주를 진정으로 공정하게 하려면…기회의 평등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높은 수준의 결과의 평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출발선에 선 자녀들의 평등은 물론 부모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장 교수는 이 아름다운 말들을 전개하면서 재원 조달이나 사회적 비용 문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 경제가 이룩한 성취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전제도 불투명했다. 노사 관계에 대해선 양측 대화를 통해 대타협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진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은 이런 식으로 짧게 얼버무리거나 피해가는 인상을 줬다. 결과의 평등에 시장자유는 질식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장 교수는 영국 유학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인기 학자다. 뛰어난 두뇌를 제외한 모든 자산과 배경은 1원 1표 시장에서 획득한 것이다. 국가가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 무언가를 베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차갑고 비인간적인 시장 논리는 힘겹기만 하다. 아동 무상급식이나 ‘1000원 아침밥’이 이슈가 됐을 때 찬성론자들은 “그저 학생들에게 밥 한 끼 주자는 건데 그걸 따지고 드냐”고 반대론자들을 공박한다. 하지만 정치가 시장에 1원 1표를 넘어서는 요구를 할 때 필연적으로 약탈과 강제 배분이 일어난다. 누군가 공짜로 1표를 얻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2원에 1표를 사야 한다. 복지 확대는 처음에 좁고 작은 규모로 시작하지만 1인 1표식 정치가 끼어들면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커진다. 정치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난다. 권력은 커지고 추종자들은 환호한다. 활력을 잃은 시장도 그들의 차지가 된다. 권력 주변의 수많은 연줄이 기업과 금융사 이사회에 진을 친다. 결과의 평등에 드라이브가 걸리면 자유는 날로 질식된다. 평등을 구현하려면 누군가의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약상과 다를바 없는 정치인들
복지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상을 제한하고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재원 낭비와 도덕적 해이가 불가피하다. 예산과 보조금은 엉뚱한 곳으로 새고 시장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려는 사람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눠달라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1원 1표는 국제 경쟁에도 냉엄하게 통용되는 원칙이다. 글로벌 경쟁이 1인 1표로 판가름 난다면 중국과 인도는 진작에 세계 최고 경제대국에 올랐을 것이다. 한국 제품 경쟁력이 약해지고 글로벌 시장 지배력이 약화되면 복지 재원도 덩달아 쪼그라든다.한국의 ‘1인 1표 정치’는 이미 10대 경제강국의 펀더멘털을 많이 훼손시켰다. 노동과 환경은 과보호되고 자본과 투자는 규제장벽에 막혀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한계사업 퇴출과 신사업 추진을 위해 한 해 16만 명을 정리해고하는 동안 한국 대기업은 단 한 명의 저성과자도 자르지 못했다. 이렇게 ‘따뜻한 자본주의’를 하면서 어떻게 경쟁력을 키우고 혁신을 단행하겠나. 장 교수가 국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두 번째 조건으로 제시한 사회적 체제(경제정책·법률체계)의 우월성은 완전히 딴 나라 얘기다.
자유시장에선 누구도 자신의 점심값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적 뇌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그것이 시장경제의 정의요, 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칙이다. 정치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잠시 따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시장의 정의를 훼손하고 구성원을 굴종과 예속의 길로 이끈다. 사람들은 처음에 정치인이 집어주는 돈에 환호를 보내지만 자신도 모르게 공짜에 길들여지고 재정에 중독된다. 정작 뇌물을 뿌리는 정치인들은 그들의 미래에 별 관심이 없다. 표를 얻고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볼 뿐이다. 마약상들이 중독자의 건강과 생명을 걱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식 깊은 장 교수가 이런 대목에 대한 심모원려 없이 글을 쓴 게 아니라면 다음 책에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경제력과 생산성이 1인 1표 정치와 어떻게 동행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