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의 흔적과 영혼이 지문처럼 남겨진 한지 고서(古書). 그 종이로 삼각형 모양의 작은 스티로폼을 하나하나 감싼 뒤 캔버스에 붙이고 거대한 조형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있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른 전광영(78)이다.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안젤름 키퍼, 애니시 커푸어, 루초 폰타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대 한국 작가 관람객 중 최다인 10만여 명을 끌어모은 그는 요즘 주요 도시 컬렉터의 관심과 미술계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다. 화려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그지만 젊은 시절의 전광영을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이 비로소 작가의 ‘황금기’라고. 역시 사람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엔날레 전시 이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작가를 경기 용인 작업실에서 만났다.
투쟁이었던 예술…한약방서 답을 찾다
인공지능이 불과 몇 초 만에 아름다운 작품을 수십 개씩 그려내는 시대. 인간의 현대미술이 인정받으려면 아름다움뿐 아니라 독창성을 겸비해야 한다. 작품의 의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도 필수다. 고서를 접어 작품을 만드는 전 작가가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건 이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그는 “지난 수십 년간 온갖 고생을 다 했다”며 “국내외에서 성공을 거두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 여전히 조바심이 남아 있었는데,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성공을 거둔 지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럴 만했다. 그의 예술 인생은 ‘투쟁의 역사’기 때문이다. 강원 홍천의 내로라하는 유지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홍대 미대에 진학한 뒤에는 늘 가난과 함께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썼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미국의 명문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 유학을 떠났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밥을 굶어가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당시 서양미술의 주류였던 미니멀리즘 사조에 가담해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 하지만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동양인치고는 괜찮네’라는 반응이 고작이었습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극단적 선택도 몇 번이나 시도했죠.”
‘동양인인 내가 서양 미술을 하는 건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과 같구나.’ 전 작가는 생각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미술을 찾기 위해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13년 만의 귀국이었지만 한국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유학파라는 이유로 한국 화단에서 비주류로 낙인찍힌 것.
“내 돈을 들여 갤러리를 빌리고 전시를 했어요. 개막일에만 지인 몇 명이 찾아올 뿐 손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엔 지인들을 부르기조차 민망하더군요.”
더 이상 그렇게 살 순 없었다. 1989년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딱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어린 시절 한약방을 하던 큰아버지댁의 풍경을 떠올렸다. 한약방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한약 봉지, 한약재를 정성스럽게 달이는 모습, 이를 끈으로 매 들고 가는 아낙네.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情)을 발견했다. 한지를 접어 만든 조형물을 모아 붙이는 ‘집합’ 연작의 탄생이었다. 잊혀지고 버려졌던 고서의 종이들이 그의 손에서 미술 작품으로 재탄생하듯, 전 작가의 예술 인생도 한지와 함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서양은 ‘박스 문화’예요. 직육면체를 정확하게 재 차곡차곡 쌓아 유통하는 거죠. 반면 한국은 ‘보자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싸주는 보자기. 그 속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는 마음. 계량이 어렵고 보자기 모양도 망가지지만 그게 바로 한국의 정이자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서양인들은 ‘유니크하다’고 감탄하는데,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어요.”
“남은 삶, 새로운 시도 이어갈 것”
이후 전 작가는 성공가도를 걸었다. 국내외 미술계에서 인정받았고, 작품 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다. 하지만 여전히 초조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 작가로서 겪어야 하는 창작의 고통은 기본. 작고할 때까지도 미술 하는 걸 반대하셨던 아버지, 미국에서의 쓰라린 경험, 한국 기성 화단의 배척이 남긴 상처들이 그를 괴롭혔다. 언론 인터뷰를 할 때도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마라톤으로 치면 이제 반환점”이라고 했다.그랬던 전 작가는 이번 인터뷰에서 “이제는 70% 정도 온 것 같다”고 했다. “여유가 좀 생겼어요. 이제는 작가로서 누구 옆에 서도 당당히 어깨를 펼 정도는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남은 삶은 새로운 기법과 표현을 자유롭게 시도해 보려고 해요. 최근 컬러풀한 작업을 많이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전통적인 흑백 작업은 할 만큼 했으니, 색동옷의 감각을 살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죠.”
그는 오는 10월 중국 베이징의 세계적인 화랑 탕컨템퍼러리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를 준비 중이다.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도 전시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미술관급 작가’가 된 전 작가에게 이젠 무엇도 아쉬울 게 없어 보였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 그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전 작가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나는 작가로서 나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서 발자국 하나를 남겼어요. 그런 점에서는 정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죠. 예전 생각을 하니 주책없이 눈물이 맺히네…. ”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싸우면서도 한 길만 고집스레 걸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였다.
용인=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