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강렬했다. 압도적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의 마력에 현혹된 관객들은 막이 내릴 때까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파우스트’는 제목을 ‘메피스토’로 했어도 좋았겠다는 인상마저 줬다. 메피스토를 연기한 박해수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이번 공연을 통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글로벌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 근간이 탄탄한 연기력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줬다. 연극 무대로 복귀하기까지 5년이 걸렸지만 조금도 어색한 기색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약 200년 전에 지은 희곡이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에게 자신의 영혼을 걸고 젊음과 쾌락을 얻는 내용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라는 구절이 여기서 나왔다.
공연에서 박해수는 시종일관 활약했다. 교활하면서도 익살스럽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파우스트나 그레첸 등과는 달리 내적 갈등이나 성격 변화가 거의 없는 역할인데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전 특유의 문어체나 시적인 표현 등으로 이뤄진 대사에 현대적 생명력을 부여했다. 박해수의 메피스토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2시간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대극장 전체의 공기를 좌우했다.
박해수뿐만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이 일품이었다. 소위 ‘연기 구멍’이 없었다. 연극계 ‘대부’ 유인촌의 파우스트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파우스트에 의해 파멸하는 아가씨 그레첸 역할의 원진아는 첫 번째 연극 도전인데도 흡인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파우스트에게 받은 묘약으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혼전임신으로 낳은 아이까지 죽인 죄로 심판받는 장면에서 보여준 절망의 눈빛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1막에서 보여준 순수하고 청량한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극은 세련된 무대 연출로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마녀들에게 둘러싸인 지옥을 비롯한 초현실적인 공간을 대형 LED 스크린과 컴퓨터 그래픽 등을 활용해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손에서 불이 나오거나 책을 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출 등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극 도중에 배우들이 무대 뒤편에 마련된 세트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시네마 시어터’ 기술도 새롭다.
연극은 대극장 공연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감각적이고 현대적이지만 고전의 묵직함을 그대로 살린 ‘파우스트’를 대극장에서 관람하고 싶다면 이번이 기회다. 공연은 이달 29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LG 시그니처홀에서.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