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농민표가 떨어져나갈 수 있다는 정치적 리스크(위험)에도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이 법이 세금만 낭비할 뿐 궁극적으론 농업·농촌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해서다. 시장 원리를 무시한 채 남는 쌀을 의무매입할 경우 공급과잉으로 쌀값은 되려 떨어져 농가 소득은 줄고,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쌀 매입에 투입시켜 청년농 육성 등 정부의 핵심 농정대책을 사실상 무력화할 것이란 분석이다.
정부는 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에 재의요구를 하기로 의결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지난 23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처리됐다.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의무 매입도록 하는 내용이다.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정부가 생각하는 농업·농촌의 성장 방향과 정 반대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 농정의 목표는 농업을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발전시켜 농가 소득을 향상시키고 농업과 농촌을 재구조화하여 농업인들이 살기 좋은 농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이 법안은 정부의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이 법의 핵심인 ‘의무매입’ 조항이 만성적인 쌀 공급과잉을 심화시키고 불필요하게 세금을 낭비시킬 것이라 보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연평균 23만t 수준의 쌀 초과공급량은 2030년 63만t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난다. 이를 사는데 들어가는 예산도 2030년 1조4000억원 수준에 이른다. 올해 농식품부 전체 예산(17조3500억원)의 8% 수준으로, 한 곳당 10명 이상의 신규 고용을 창출하는 1ha(약 3000평)짜리 스마트팜 300개를 만들 수 있는 규모다.
정부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식량안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봤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21년 기준 44.4%에 불과하지만 쌀 자급률은 90~100%를 오간다. 반면 밀은 1%대 콩도 24% 수준이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 열린 브리핑에서 “쌀은 이미 충분한 양을 정부가 비축하고 있고 남아서 문제”라며 “(의무매입은)농업인들이 계속 쌀 생산에 머무르게 해 정작 수입에 의존하는 밀과 콩 등 주요 식량작물 생산을 늘리는 것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쌀 이외의 다른 품목과의 형평성을 해칠 수 있고, 이 같은 요구가 전체 농업으로 퍼질 경우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것도 거부권을 행사한 또 다른 이유다. 지난달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40개 주요 농민단체가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이 가운데 한돈협회, 낙농협회, 양계협회 등 축산 단체들의 반발이 크다.
한정된 예산이 쌀 의무매입에 투입될 경우 자연스럽게 축산 등 쌀 이외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반대 이유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양곡법이 통과되면 다른 품목에서 유사한 요구를 했을 때 반대할 근거가 없어진다”며 “농업에서의 최소한의 시장 기능도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오는 6일 민당정 협의회를 개최해 양곡관리법 개정의 대안이 될 쌀 수급 안정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윤석열 정부가 논에 쌀 대신 밀·콩·가루쌀·조사료 등을 심으면 ha당 최대 480만원까지 지급하는 전략작물직불제를 포함한 직불제와 가루쌀 산업 육성 방안 등이 담길 전망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