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성관계 입막음'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이 기소돼 재판받는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다.
겉으로는 트럼프에게 악재로 보인다. 실상은 다소 복잡하다. 공화당 대선 경선을 1년 앞두고 트럼프에게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면서 그는 다시 무대의 중심에 섰다. 긴 캠페인을 함께할 열성 지지층도 확보하고 있다.
미국 정치가 감당해야하는 후과는 만만치 않다. 전직 대통령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이미 깨졌다.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정치가 양극화하는 부작용도 클 것으로 전망된다.
왜 트럼프는 법정에 서나
사건의 발단은 트럼프와 성관계를 가졌고, 입막음을 위해 돈을 받았다고 주장한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본명 스테파니 클리퍼드)의 폭로다.대니얼스는 2006년 7월 타호 호수에서 열린 자선 골프대회를 계기로 트럼프를 만났으며,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의 변호사 마이클 코언으로부터 입막음을 위한 돈 13만달러(약 1억4000만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대니얼스는 2018년 이러한 사실을 공개했으나 변호사인 마이클 아베나티가 갈취 사기 등 혐의를 받으며 스캔들은 유아무야됐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이 사건이 지난달 30일 다시 떠올랐다. 뉴욕 맨해튼 대배심(grand jury)이 트럼프 기소를 결정하면서다. 뉴욕 맨해튼 지방검찰청은 트럼프 측이 입막음을 위해 선거 장부를 조작해 합의금을 만들었다는 의혹을 수사해왔다. 민주당 소속 엘빈 브래그(49) 맨해튼 지방검사장이 이 과정을 주도했다.
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돈을 주고 입막음을 한 것 자체는 법적 문제가 없다. 다만 이 비용을 회계 장부에 허위로 기재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코언이 트럼프를 위해 돈을 쓴 정황이 정치자금 기부로 인정될 경우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불법 기부가 된다. 선거법 위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측은 입막음 비용을 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이번 재판의 의미는
이번 재판으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재판정에 섰다. 전·현직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건국 이래 237년의 역사가 깨진 것이다.미국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 등 대표자에게 넓은 재량권과 법적 면책권을 부여해왔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뒤 기소될 뻔 했지만,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사면을 받았다. 포드는 "우리 모두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비극의 책임 일부를 지고 있고, 누군가는 거기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며 정치 보복의 가능성을 끊어냈다.
트럼프는 자신이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자신이 기소된 데 대해 "미국은 여러 면에서 제3세계 국가같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밝혔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등 일부 언론은 대통령이 법정에 선 나라의 사례로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한국 등을 꼽았다.
이번 사태가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처럼 극단적 정치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은 새롭고 폭발적이며 더 격렬하게 분열될 당파성의 시대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대선 경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 정치사의 오점으로 평가되는 이번 기소가 트럼프에게는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대선을 1년 앞두고 지지층이 결집하며 지지율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매체 악시오스(Axios)에 따르면 기소 소식이 알려진 지난 30일 이후 트럼프는 500만달러(65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모았다. 이 중 25%가 처음 정치자금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기소 소식 이후 하루 만에 400만달러를 모금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 공화당원 사이에서 지지율도 올랐다. 로이터통신이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의뢰해 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48%가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전주 대비 4%포인트 오른 수치다. 기소 이후 모든 언론이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고있다. 공화당 경선 주자로서는 이러한 관심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지금 뉴욕 분위기는
재판이 열리는 뉴욕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결집하면서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감돈다.트럼프는 출석을 하루 앞둔 3일(현지시간) 뉴욕에 도착했다. 자택인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출발한 그는 경호차량 5대의 호위를 받으며 팜비치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TRUMP'라는 문구가 새겨진 성조기 색깔의 전용기에 오른 그는 뉴욕 라과디아 국제공항에 내린 뒤 곧바로 맨해튼 트럼프 타워로 향했다. 트럼프는 출발 직전 자신이 만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한때 위대했던 우리나라가 지옥으로 가고있다"는 글을 올렸다.
뉴욕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여들며 긴장감이 고조됐다. 트럼프타워 앞에는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뒤쪽으로 지지자들이 운집했다. 뉴욕 주 경찰은 국회의사당 점거와 같은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3만5000명의 인원을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날 미네소타주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뉴욕에서 불안을 우려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뉴욕 경찰을 믿는다"며 사법체계를 신뢰한다고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4일 법정 출석 후 플로리다에 복귀해 공개연설을 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