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60년 전 쓰여진 희곡 '만선' 속 곰치네를 괴롭히던 바다와 파도는 여전히 매섭다. 1964년에 발표된 이 작품 속 힘겨운 삶의 현장은 2023년 지금에도 동시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만선'은 고(故) 천승세 작가의 작품이다. 1964년 국립극단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그해 초연돼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작은 섬에 사는 어민들의 척박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한국식 리얼리즘' 연극의 정수로 꼽힌다. 평생 배 타는 일밖에 모르고 살면서도 본인 소유의 배가 없어 선주의 '갑질'에 시달리며 어렵게 사는 곰치네 가정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바다에 나간 아들들이 줄줄이 목숨을 잃는 데도 만선을 향한 욕심과 고집을 꺾지 않는 곰치와 그의 아내 구포댁의 고통스러운 삶이 묘사됐다.
이번 공연에서 연출가 심재찬과 윤색을 맡은 작가 윤미현 등은 1960년대에 쓰여진 희곡에 현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여러 서사석 장치를 추가했다. 원작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여성 캐릭터의 변화. 구포댁의 성격을 원작보다 강하게 만들어서 가부장적인 곰치와 균형을 맞췄다. 한국적 여성을 고분고분하고 인내하는 캐릭터로 유형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들 부부의 딸 슬슬이가 본인을 욕보이려는 범쇠에게 마냥 당하지만 않고 반격을 가하는 장면 또한 같은 의도에서 추가됐다.
새롭게 추가된 서사적 장치를 제외하고서라도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현재와 맞닿아 있다. 고기를 가득 잡은 다른 배에서 울려 퍼지는 징소리를 들으며 곰치네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시대를 뛰어 넘는 보편성을 지닌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아들 세대와 전통을 고수하는 아버지 세대의 갈등, 갑을 관계에서 비롯된 경제적 착취 구조 등은 현대에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극 말미, 무대 위에 총 5톤 분량의 물이 쏟아진다. 바닷가의 비바람을 실감나게 구현하기 위한 연출이다. 비바람의 서늘한 공기가 객석까지 전해지면서 비극적인 분위기의 절정을 이룬다. 곰치와 구포댁이 느끼는 절망스러운 감정이 피부로 느껴진다. 바닥이 기울어진 무대 디자인은 불안한 삶의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각각 곰치와 구포댁 역을 맡은 배우 김명수, 정경순의 연기 호흡이 돋보인다. 공연은 4월 9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